올해도 어김없이 민족의 대이동이 이어지고 있다. 신종 플루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추석연휴가 3일뿐인 아쉬움을 달래며,고향 오가는 길의 훤한 고생문을 마다하지 않고 말이다.

우리네 추석에 해당하는 추수감사절을 즈음해 미국인들이 즐겨하는 조크가 있다. '올해 추수감사절엔 어디로 갈까?' 정답은 '터키(칠면조)를 가장 맛있게 굽는 할머니 집'이다. 굳이 부계냐 모계냐를 가리지 않고 양계제적 전통을 발달시켜 온 서구에선 명절 때 부모나 친지 방문이 비교적 자유롭게 이뤄진다. 작년 추수감사절에 본가를 방문했다면 올해는 처가에 다니러 가고,올해 추수감사절을 처가와 함께 보냈다면 크리스마스는 본가 쪽으로 발길을 돌리는 식이다.

따지고 보면 우리네 민족의 대이동은 부계제의 전통을 따라 한 방향으로 진행되어온 것이 사실이다. 곧 성(姓)이 같은 사람들이 두루 모이는 자리에 '각성받이'인 시어머니와 며느리들이 같이 하게 된다. 고부란 것이 한 남자를 사이에 두고 맺어진 관계인 만큼 편치 않은 심경에 미묘한 갈등이 어우러지곤 했던 셈이다.

이 고부갈등이 여성들 입장에선 꽤나 억울(?)한 측면이 있다. 고부를 이어주는 한 남자가 아들이자 남편으로서의 역할을 현명하고 요령있게 수행하면 고부 사이에도 별 문제가 없다. 그러나 대개는 이 남자가 시어머니 앞에선 며느리 편들고 며느리 앞에선 시어머니 역성 들다 문제를 대책없이 키운 다음,원인 제공자인 자신은 쏙 빠져버리고 애꿎은 여자들끼리 갈등하게 만드는 구조를 만들어 왔음에랴.

실제로 친족관계 안에서 고부 갈등이 전형적으로 표출되는 문화는 한국을 위시해 중국,일본,대만 등 부계제가 발달된 지역에 국한돼 있다. 대신 양계제가 발달된 서구에선 사위-장모 갈등이 종종 사회적 풍자 대상이 되곤 한다. '사위는 백년 손님'이요 '사위 사랑은 장모'라는 우리네 정서에 비추어보면 사뭇 낯선 일이 아닐 수 없다.

한데 우리 주위에서도 이젠 서서히 양계제적 성향이 감지되고 있는 듯하다. "우리 사위 몇 푼 버는지는 소상히 알고 있는데 우리 아들은 얼마를 버는지 도통 모르겠다" 하시는 시어머님 하소연이 심심치 않게 들려오는가 하면,"장모님께서 '자네 무슨 일 하나' 꼬치꼬치 캐물으시면서 잔소리를 해대는 통에 괴롭다"는 사위의 푸념 또한 이젠 낯설지 않다.

하기야 맞벌이 부부 10쌍 가운데 8쌍이 친정 가까이 살며 자녀 양육의 도움을 받는 현실이나,딸만 둔 부모 비율이 서서히 증가하고 있음에 비추어볼 때 부계제적 명절 풍습만을 고집함은 분명 탁월한 선택은 아닐 듯하다. 한동안 대중매체를 요란하게 장식했던 며느리 명절 증후군이 올해는 다소 잠잠해진 걸 보면,이 또한 위로받아도 좋을 징표 아니겠는지.

양계제로 가는 길에 필히 한번쯤 짚고 넘어가야 할 건 우리네 친족관계에 내재한 이중의식일 게다. 며느리는 굳이 더 있다 가라 붙잡으시면서 딸네는 왜 이리 안 오는지 기다리시는 어머님들.아이 키우느라 잠시 휴직한 며느리에겐 "이 어려운 시대 어찌 남편만 바라보느냐" 타박하시다가도 당신 딸에겐 "여자 팔자는 그저 남편이 벌어다주는 돈으로 사는 것이 상팔자"라시는 그 마음.사위가 집안일도 잘하고 아이도 잘 돌보면 흐뭇해 하시다가도 아들이 행여 설거지라도 하는가 싶으면 못내 마음이 불편해오는 어머님들.

이제 양계제가 거스를 수 없는 대세라면 시어머님 마음 따로 장모님 마음 따로 친족 내 역할에 충실한 이중의식을 뛰어 넘어,딸의 입장과 며느리 입장을 같은 여성으로서 이해할 수 있는 포용력을 갖춘다면,더불어 아들 사위 편 가르기보다 함께 품어주는 관대함을 보여준다면,금상첨화일 듯싶다.

함인희 < 이화여대 교수·사회학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