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정책에 따라 부실 계열사의 증자에 참여했다가 회사에 손해를 입힌 경영진에 법적 책임을 물을 수 없다는 법원 판결이 나왔다. 서울중앙지법 민사합의31부(이홍철 부장판사)는 29일 동아건설의 파산관재인이 "부실 계열사에 출자해 회사에 손해를 끼쳤다"며 최원석 전 회장 등 동아건설의 옛 경영진을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 소송에서 원고패소 판결했다. ◆정부정책 따른 경영결정은 무죄1996년 8월 정부는 동아그룹 계열사인 동아생명의 부채가 2조원을 넘어서는 등 부실화될 우려가 있자 동아생명에 대해 3747억원의 자본금을 추가 확보하라고 명령했다. 이에 당시 동아생명 주식 75%를 소유하고 있던 동아건설은 자체 자금 사정이 좋지 않다는 점을 들어 동아생명의 유상증자에 참여하지 않겠다는 방침을 정부에 전달했다. 그러나 정부가 동아생명이 증자에 실패할 경우 계약자 배당 제한 등 강도 높은 제재를 가하겠다고 발표하자 동아건설은 입장을 바꿨다. 결국 동아건설은 동아생명의 신주 900억원어치를 인수했으나 1999년 11월 8381억원의 자본잠식 상태에 있던 동아생명은 금융감독위원회에 의해 부실금융기관으로 지정됐다. 이후 동아생명은 정부 명령에 따라 주식을 모두 무상소각했으며 이에 따라 동아건설도 900억원의 손해를 입었다. 법원은 동아건설 경영진의 당시 결정에 대해 "불확실한 기업 경영 환경에서 회사에 이익이 된다는 판단에서 내린 합리적인 결론"이라는 입장을 밝혔다.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동아건설은 동아생명이 파산할 경우 1대 주주로서 금융기관으로부터 신규여신 중단 등의 불이익을 당할 것을 우려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재판부는 특히 "이처럼 경영진의 선의를 보호하는 것은 자본주의사회의 창의성 역동성과도 직결된다"고 덧붙였다. ◆'경영상 판단'인정 범위 논란 대법원은 최근 경영진의 재량 범위가 쟁점이 된 사건에 대해 서로 엇갈린 판결을 내린 바 있다. 대법원 3부는 지난달 28일 삼성전자가 삼성종합화학의 주식을 시가보다 싼 값에 계열사에 매도한 데 대해 "삼성전자 경영진은 주주들이 입은 손해를 배상하라"고 판결했다. 주식가치를 제대로 평가해 주주들의 이익을 보호해야 할 책임을 다하지 않았다는 것이 재판부의 판단이었다. 그러나 대법원 3부는 같은 날 삼성전자가 1997년 자본잠식 상태에 있던 이천전기를 인수했다가 1900억여원의 손해를 본 것에 대해서는 경영진의 책임이 없다고 판결했다. 재판부는 "기업 경영은 모험과 위험성이 수반되는 것으로 신규 사업분야에 진출하려다 실패한 것에 대해서까지 법적 책임을 물을 경우 기업활동을 위축시킬 수 있다"고 밝혔다. 유승호 기자 ush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