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화제 하나 때문에 이 고생을..." 직장인 송민호씨(33.서울 동작구 신대방동)는 사랑니를 뽑은 뒤 겪었던 지난 연말의 일을 생각하면 지금도 기분이 씁쓸하다. 정씨의 고생길은 처방전을 들고 병원 근처의 한 약국을 찾으면서부터. "죄송하지만 의사가 처방한 약이 없습니다"라는 약사의 말로 시작된 ''약국순례''는 7번째 약국에 가서야 끝을 맺었다. 하지만 정작 정씨를 허탈하게 만든 건 그렇게 구하기 힘들었던 약이 고작 ''소화제''였다는 사실. "진료의사와 통화가 안돼 다른 소화제로 대체조제를 할 수 없다는 얘기를 들었을땐 너무 황당했다"고 송씨는 푸념했다. 송씨처럼 처방전에 적힌 약을 구하지 못해 여러 약국을 돌아다녀야 하는 사람들이 갈수록 늘고 있다. ◇ 누구 탓인가 =약사들은 이런 부작용의 원인을 한결같이 대체조제에 미온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는 의사들에게 돌린다. 서울 보라매공원내에서 약국을 운영중인 김모씨(45)는 "갑자기 처방약이 종전과 달라지는 바람에 미처 약품을 구비하지 못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며 "게다가 거의 대부분의 의사들이 성분명 대신 약품명으로 처방전을 쓰기 때문에 약국은 이에 대응하느라 같은 성분의 약을 많게는 20∼30가지 이상 보유하고 있다"고 말했다. 위궤양치료제의 경우 ''라니티딘''이라는 성분명으로 처방하면 조제할 수 있는 약품이 80개나 되지만 ''잔탁''이라는 특정약품명을 처방전에 기입하면 이 약 외에는 조제가 불가능하다는 얘기다. 시.군.구별로 일정범위 내의 약을 정해 처방리스트를 작성하기로 했던 의.약.정간의 약속이 이행되지 않고 있는 것도 주요한 원인으로 지적되고 있다. 지난 2000년 의.약.정 합의시 의사협회는 해당지역의 약사협회에 자주 처방하는 약의 목록을 적은 처방리스트를 공개키로 했었다. 대한약사회의 신현창 사무총장은 "의사들의 비협조로 국민들의 불편만 커지고 있다"며 "종잡을 수 없는 처방전 때문에 약국에는 현재 5백억∼1천억원어치의 재고의약품이 켜켜이 쌓여 있다"고 설명했다. 이에 대해 대한의사협회의 주수호 공보이사는 "의약분업 이전에도 현재와 같은 수준의 재고의약품은 불가피했다"며 "환자들마다 특성에 맞는 약을 처방하는 것은 의사들의 기본적인 의무이므로 이를 문제삼는 건 말이 되지 않는다"고 반박했다. ◇ 대책은 없나 =대한약사회 소속 약사인 최헌수씨는 "보건당국이 의사협회의 처방리스트 작성을 독려하고 이를 어길 경우 강하게 제재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하지만 보건복지부 입장에서는 뾰족한 제재수단이 없는 상황. 복지부의 한 관계자는 "법기술적으로 의사 개인이 아닌 협회를 징계하는건 의미가 없다"며 "지금으로선 의사와 약사가 국민을 생각해 합리적인 선에서 타협하는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안재석 기자 yago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