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는 어린 시절 다수결이야말로 민주주의 그 자체라고 배웠다. 초등학교 5학년 때인가 처음으로 학급회장 선거에서 표를 던지며 나도 민주주의를 실천하게 됐다는 뿌듯함을 느꼈다. 70년대의 문턱이던 당시와 80년대까지 이어지던 권위주의 시대에는 그랬다. 자유롭게 투표해 다수결로 사람도 뽑고 규칙도 정하는 것이 이상(理想)이었다. 자유로운 투표 분위기와 거리가 멀고 소수가 다수를 지배하던 상황에서 다수결이나 다수주의라는 말만 들어도 피가 솟구치던 때였다.

근래엔 다수결 못지않게 합의주의가 중시된다. 다수가 표로 의사결정을 주도하기보다는 소수의 의견을 존중해 협의 · 합의해야 함이 강조된다. 숫자의 논리엔 부정적 뉘앙스가 붙었다. 시대가 바뀐 덕이다. 억압적 권위주의는 민주화 앞에 점차 사라졌고,소수가 다수 위에 군림하던 시대는 지나갔다. 다수의 피(被)억압을 걱정할 필요가 줄면서 오히려 다수가 소수를 무시하고 독주하는 전제(專制)를 경계하게 됐다.

국회는 합의주의 운영의 한 예를 보여준다. 의사진행은 주로 원내교섭단체들 간의 합의로 이뤄진다. 때론 표결을 하기도 하지만, 다수결보다 여야 합의로 표결 없이 의사결정을 하는 경우가 훨씬 많다. 합의를 해야 하므로 다수결에 의존할 때에 비해 소수당의 발언권이 세다.

그러나 합의주의 운영이 좋은 것만은 아니다. 만약 정당 간 합의가 안 이뤄지면 국회는 곧 교착에 빠져 공전된다. 산적한 의안은 방치되다가 따가운 여론 앞에 여야가 임시방편으로 타협을 하면 시간에 쫓겨 회기 막판에 몰아치기로 처리된다. 법안 심의가 신중하게 이뤄질리 없다. 교착을 깨기 위해 다수당이 날치기나 강제력으로 밀어붙이는가 하면,소수당은 단상 점거나 회의장 봉쇄라는 편법을 물리적으로 동원한다.

합의주의는 잘하면 조화를 낳지만 잘 못하면 국회를 전쟁터로 만들고 민생을 방치시킨다. 표심에 부합하는 국회운영이 힘들어지며 선거의 의미가 약해지고,국회 기능은 엉망이 되기 쉽다. 회기 중엔 온갖 편법,억지,폭력으로 국회를 마비시키더니 휴회 중엔 남 욕하는 장외 선전전으로 사회를 양분시키는 우리 국회의 현재 모습이 예외이기보다는 일상이 된다.

극단적 다수주의가 답이 아니듯 과도한 합의주의도 바람직하지 않다. 다수의 전제와 함께 소수의 횡포도 무서운 독(毒)이다. 관건은 양자 사이의 균형이다. 미국 의회는 이와 관련해 시사점을 준다. 미국 하원은 다수주의에 따라 다수당(한 석이 많을지라도)이 의사과정을 지배한다. 하원 소수당은 별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반면 상원은 상대적으로 합의주의에 더 가까워 소수당이 다수당을 효과적으로 견제할 수 있다. 이처럼 성격이 다른 양원이 공존함으로써 다수의 전제도 소수의 횡포도 아닌 적절한 균형을 유지할 수 있다.

미국 의회에 비해 우리 국회에서는 합의가 너무 큰 비중을 차지하고 소수당의 파괴력이 과도하다. 합의를 존중하는 미국 상원에서 의원 한 명이라도 합법적 의사진행방해(필리버스터)를 할 수 있지만,100명의 의원 중 60명의 투표로 의사진행방해를 당장 끝낼 수 있다. 의원들의 토의가 충분히 진행되지만 때가 되면 표결로 의사결정을 한다. 전체의석의 3분의 1도 차지하지 못한 소수당이 각종 물리적 수단으로 회의진행을 막고는 전승자처럼 자축하는 모습은 상상할 수도 없다.

오죽하면 국회무용론 같은 극단적 주장이 나오겠는가. 국회의원들은 강한 위기감을 느껴야 한다. 경제난으로 무력감을 느끼는 국민을 절망으로 몰지 않으려면 무언가를 성취하는 조화로운 국회 모습을 보여야 한다. 소수가 억압 받는다고 항의하기에 앞서 과연 소수의 횡포가 지나치지 않은지,다수결의 고전적 가치는 어디 갔는지 생각해볼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