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쇠퇴 기로 日, 마지막 찬스라지만
자동이체 신청에도 인감 필요
20년째 '온라인 행정' 구호만"

정영효 도쿄 특파원
[특파원 칼럼] 日 디지털청 출범과 은행 '뺑뺑이'

일본의 디지털 정책을 총괄하는 디지털청이 지난 1일 출범했다. 출범을 즈음해 기자는 요즘 은행 ‘뺑뺑이’를 돌고 있다. 신문 구독료부터 보육원 급식비까지 은행 자동이체를 통해 납부해달라는 요청이 부쩍 늘어서다. 이번주에도 세탁비와 아이 학원비 등 자동이체 요청이 두 건 있었다.

일본에선 은행 지점을 오가지 않고는 자동이체를 신청할 수 없다. 먼저 세탁소와 학원이 자동이체 신청서류를 발행한다. 발행회사 보관용, 은행 보관용, 본인 보관용까지 3장이다. 여기에 이름과 주소, 은행 계좌번호를 반드시 계좌 보유자가 직접 적어야 한다.

각각의 서류마다 은행에 등록된 본인 인감을 찍어야 한다. 이후 은행 지점을 찾아 자동이체 서류에 은행 인감을 받아야 한다. 이 서류를 다시 우편으로 보내 발행회사가 접수하면 비로소 자동이체 신청 절차가 마무리된다.

하지만 서류가 반송돼 기자는 이번주에만 은행 지점을 네 번 가야 했다. 첫 번째는 인감란에 습관적으로 사인을 해서, 두 번째는 은행에 등록된 인감과 다른 도장을 찍어서, 세 번째는 인감 가운데 하나가 좀 희미하게 찍혔다는 이유였다. 일본 은행에선 금융회사 인감 하나 받는 데도 1시간을 족히 기다려야 한다.

아프가니스탄 카불공항을 탈출하는 것만큼 어려운 절차를 거쳐도 끝이 아니다. 분명히 돈이 빠져나갔는데 미지급 청구서가 툭하면 날아온다. 정부나 본사가 서두르라고 해서 자동이체로 바꾸기는 했는데 납부를 관리하는 시스템은 여전히 부실해서라고 한다. 자동이체 이용자가 적을 수밖에 없다.

자동이체는 캐시리스(신용카드·모바일페이 결제) 이용률로 직결된다. 한국의 이용률이 97%로 세계 1위인 반면 일본은 20% 안팎으로 주요국 중 꼴찌다. 반대로 국내총생산(GDP) 대비 시중 현금의 비율은 21%로 단연 1위다. 일본 정부는 디지털 개혁의 하나로 2025년까지 캐시리스 이용률을 40%까지 높인다는 목표다.

디지털청은 자동이체를 신청하는 데도 은행을 몇 번씩 오가야 하는 일본의 낙후성을 해소할 구원투수로 기대를 모으고 있다. 니혼게이자이신문은 디지털청 출범에 대해 “아날로그 국가인 채로 쇠퇴의 기로에 선 일본이 경제·사회 전체를 디지털화할 수 있는 최후의 기회”라고 했다. 하지만 일본 내부에서도 성공하리라 예상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몇 년마다 되풀이되는 공염불이라는 것이다.

일본 정부는 2000년 정보기술(IT) 기본전략을 수립하고 “5년 내 세계 최고의 IT 국가가 되겠다”고 선언했다. 2003년엔 모든 행정 절차의 온라인화를, 2006년에는 행정 절차의 온라인 이용률 50%를 공언했다.

디지털청의 핵심 목표도 ‘행정 절차의 온라인화’다. 스가 요시히데 일본 총리도 “관공서에 가지 않고도 행정 수속이 가능한 사회”를 약속했다. 20년째 같은 목표를 반복하는 건 진전이 없다는 얘기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일본은 정부 부처와 1700여 개 지방자치단체가 제각각 다른 행정정보 입력시스템을 쓴다. 다른 부처나 지자체와는 자료 공유조차 불가능하다. 정부의 디지털 관련 예산이 1조엔인데 기존 시스템의 유지관리비로 7000억엔이 나간다. 클라우드 서비스 구축 같은 차세대 시스템 도입은 꿈도 못 꾼다.

디지털 정책도 내각관방(종합 전략), 총무성(지자체 디지털화), 경제산업성(민간 디지털화), 후생노동성(온라인 진료), 문부과학성(원격교육) 등에 뿔뿔이 흩어져 있다. 디지털청은 중구난방인 담당 부처와 인력, 예산을 한데 모은 부처다. 하지만 디지털청과 협업하는 IT 대기업 담당자는 “벌써부터 출신 부처별로 주도권 다툼을 벌이고 있다”고 증언한다. 지자체의 거부감도 크다. 행정 서비스가 디지털로 통합되면 다른 지자체와 비교 당하기 쉽다는 이유에서다.

출범 다음날 주요 일간지에는 히라이 다쿠야 디지털개혁담당상이 ‘디지털청’이라고 쓴 종이팻말을 든 사진이 실렸다. 3일 니혼게이자이신문에는 디지털청의 전면 광고가 7페이지에 걸쳐 게재됐다. 같은 날 일본 최대 포털사이트 야후재팬에서는 디지털청 광고를 찾아볼 수 없었다.

종이팻말과 신문 광고로 출범을 알린 디지털청의 아날로그적인 행보에서 많은 일본인은 몇 년 뒤 아무 일 없었다는 듯 ‘행정절차 온라인화’를 공언하고 있을 자국 정부를 예상한다.
주민등록번호 보급에 힘 쏟는 日
[특파원 칼럼] 日 디지털청 출범과 은행 '뺑뺑이'

일본과 덴마크는 같은 시기에 디지털화에 본격 나섰다. 일본 정부가 ‘5년 내 세계 최고의 정보기술(IT) 국가를 건설하겠다’며 IT 기본 전략을 수립한 2000년 덴마크도 디지털 서명제도를 시행했다.

20년 뒤인 지난해 덴마크는 2010년 1위였던 한국을 제치고 세계 최고 수준의 전자정부 국가에 올랐다. 일본은 14위로 20년째 10위권 진입에 실패했다.

출발이 같았던 두 나라의 격차가 이렇게 커진 이유를 일본은 주민등록제도의 유무로 본다. 덴마크는 1968년 국민번호제도를 도입했다. 일본이 디지털화의 모델로 삼는 한국과 에스토니아도 주민등록번호 제도를 갖고 있다.

일본 정부는 2016년 주민등록번호 제도인 ‘마이넘버 카드’를 채택했다. 하지만 지난 8월 25일 기준 보급률은 37%에 그친다. 개인정보 공개를 꺼리는 일본인들의 성향 때문이라는 분석이다.

마이넘버 카드의 전 국민 보급을 디지털 행정의 필수요건으로 보는 일본 정부는 다양한 기능과 혜택을 마이넘버에 통합하고 있다. 다음달까지 건강보험증이 마이넘버 카드로 대체되고 내년에는 스마트폰에 등록해서 쓸 수 있게 된다. 2024년에는 운전면허증도 마이넘버 카드로 일원화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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