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산 시설물을 철거해가라”는 일방적인 대남 통지는 북한의 ‘막가파식 DNA’가 한 치도 달라지지 않았음을 확인시키고 있다. 남북이 서로 이해의 폭을 넓히고 관계를 심화시켰다는 문재인 정부의 주장이 짝사랑이자 환상이라는 점을 분명하게 보여줬다. 문 대통령이 국회 예산안 시정연설에서 “남북 간 평화경제 구축” 메시지를 낸 직후에 나온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반응이라는 점에서 실망은 커진다.

철거 요구의 부당함은 물론이고 진행 과정의 저급한 언행은 모욕적인 수준이다. 5597억원의 거금을 내고 북한 조선아세아태평양평화위원회와 1998년 체결한 현대아산의 금강산관광지구 독점사업권은 유효기간이 50년으로, 아직 30년 가까이 남아 있다. 해금강호텔 온정각 등 관광인프라 구축에 2268억원을 쏟아부은 현대아산에 한마디 상의나 통보 없이 “시설을 쓸어내겠다”고 대놓고 말하는 것은 상식 밖이다.

철거 관련 복잡한 실무적인 문제들을 대면하지 않고 문서교환 방식으로 합의하자는 제의도 황당하다. 관광중단의 책임이 남측에 있으니 자진철수 방안을 알아서 내놓으라는 격이다. 북한 초병이 2008년 우리 관광객을 조준사격하는 만행을 저지르고도 일절 사과를 거부한 게 관광중단의 원인이라는 점을 인정하지 않는 어처구니없는 행태다. 관광재개의 가장 큰 걸림돌이 비핵화를 둘러싼 자신의 ‘이중 플레이’라는 점도 망각한 처사다.

북의 떼쓰기는 금강산 관광뿐만이 아니다. 불과 1년여 전 9·19 평양 공동선언에서 방역·보건의료에 협력하기로 합의하고도 돼지 전염병 방역 요청에 불응했고, 평양에서 진행된 월드컵 남북축구예선은 희대의 깜깜이 진행으로 파행됐다. 이런 북한의 어거지는 우리의 저자세가 자초하고 촉발한 측면이 크다. 대통령을 원색적으로 비난해도, 미사일을 쏴도 저자세로 일관하다 보니 어느새 미·북이 두는 장기판에 졸(卒)로 전락한 모습이다.

‘철거 통보’에도 정부는 항의하기보다 “창의적 해법을 마련해서 협의하겠다”며 눈치보기에 급급하다. “모처럼 대화의 기회가 열린 것”이라는 한가한 인식도 드러났다. 그 ‘창의적 해법’이 무언가를 또 양보하고 무마하는 방식이 된다면 민심과 국제사회의 인내는 바닥을 드러내고 말 것이라는 점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철거 강행 시 ‘엄중한 사태가 벌어질 것’이라는 메시지를 분명히 하고, 필요하다면 추가적인 독자제재안도 공표할 필요가 있다.

차제에 진지하게 짚어봐야 할 것은 김정은의 비핵화 의지 표명으로 시작된 대화의 문이 거의 닫혀가고 있다는 점이다. 북핵 협상은 어느새 ‘완전하고 검증가능하며 불가역적인 핵폐기(CVID)’가 아니라 ‘핵군축 협상’처럼 변질되고 있다. 금강산 압박은 선택을 강요하는 북한 특유의 벼랑 끝 전술의 일환으로 봐야 한다. 대한민국을 자신들의 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한 고도의 편 가르기인 것이다. 이럴 때일수록 이념적 맹신을 벗어나 진실을 직시하는 지혜와 용기가 필요하다. 잔꾀로 현실을 회피하려 든다면 거대한 ‘진실의 쓰나미’가 덮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