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 칼럼] 한국에 온 간호사들
한국에 처음 발을 디딘 외국인 간호사는 미국 장로회 소속 여자 선교사 애니 엘러스(1862~1938)다. 그는 1884년 보스턴 간호학교를 졸업한 뒤 선교부 총무의 부탁을 받고 이듬해 조선에 왔다. 당초 2년만 일하고 미국으로 돌아갈 예정이었지만, 명성황후와의 만남이 그의 운명을 바꿨다.

명성황후는 서양 의료기관인 제중원에 여자 주치의를 요청했다. 그러나 제중원엔 여자 의사가 없었다. 의사 호러스 알렌은 엘러스에게 명성황후를 진찰하게 하고 처방은 자신이 내렸다. 명성황후는 엘러스를 총애해 정2품 황후전담 주치의로 임명했다. 엘러스는 명성황후가 1895년 시해된 뒤 43년간 어려운 사람들을 돌보다가 타계했다. 서울 양화진에 있는 그의 묘비엔 ‘바르게 살자, 이웃을 사랑하자’는 문구가 적혀 있다.

구한말과 일제 강점기 외국 간호사들은 주로 선교활동 일환으로 한국에 왔다. 남녀가 유별한 사회 분위기 속에서 외간 남성의 피고름을 닦아줘야 하는 간호사 일을 하기란 여간 힘들지 않았다. 그런 가운데에서도 미국 선교사 에스더 실즈(1868~1940)는 40년 넘게 어려운 이웃을 돕고 간호사를 키우는 데 힘써 ‘한국 간호계의 어머니’로 통한다.

서서평(徐舒平)이란 이름으로 잘 알려진 독일계 미국인 엘리자베스 셰핑(1880~1934)은 ‘한국판 테레사’로 불린다. 1912년 한국에 온 셰핑은 전라도 일대 한센병 환자와 걸인을 돌보고 고아들을 자식 삼아 한 집에 살다가 생을 마쳤다. 광주시 최초 시민사회장으로 치러진 장례식엔 수많은 걸인과 고아들이 상여를 메고 뒤따르면서 “어머니”라고 외치며 애도했다.

캐나다 출신 마거릿 에드먼즈 등 일제 강점기 2000여 명의 외국 간호사들이 우리나라에 들어와 열악한 환경에서 봉사와 사랑 정신으로 환자들을 돌봤다.

6·25전쟁 땐 미국 스웨덴 노르웨이 덴마크 인도 이탈리아 등 6개국이 약 3년간 군과 민간 간호사 1500여 명을 한국에 보냈다. 이들은 낙동강에서 압록강까지 장병들과 함께 전장(戰場)을 누비면서 50명 넘게 희생되거나 다쳤다.

미국 첫 여성 장군으로 6·25전쟁 당시 인천 상륙작전에도 참가했던 애나 메 헤이스 예비역 준장이 지난 7일 워싱턴DC 요양원에서 별세했다. 향년 97세. 2차대전 때 태평양 격전지에서 미군을 간호한 그는 1950년 9월 한국으로 와 수많은 한국군과 미군 병사의 목숨을 구해 미국 정부로부터 훈장을 받았다.

간호복 대신 철모와 전투복을 입고 숱하게 사선(死線)을 넘나들기도 한 그는 생전에 “태평양전쟁에 비해 한국전쟁이 상황이 훨씬 나빴다”고 회상했다. 1960년 자원해 부산 후송병원에서 2년간 간호장교로 근무하기도 했다. 고인의 명복을 빈다.

홍영식 논설위원 ysho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