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언의 논점과 관점] 해운업 위기 계속되고 있다
세계 해운업계에는 박스클럽(Box Club)이라는 모임이 있다. 정식 명칭은 ‘세계 컨테이너선(船) 최고경영자 모임(ICCO)’으로 1992년 출범했다. 박스라는 말에 컨테이너 뜻이 담겨 있어 박스클럽으로 불린다. 각국 해운사 최고경영자들이 모여 최근 업황과 규제 동향 등 현안을 논의하고 친목을 다지는 자리라 해운업계가 중시하는 행사다.

유창근 현대상선 사장은 얼마 전 “박스클럽을 보면서 세계 해운산업의 격변을 체감했다”고 전했다. 지난달 대만에서 열린 박스클럽 회의에 다녀온 그는 “회원사 수가 3년 새 30% 넘게 감소했는데도 이게 끝이 아닌 것 같다”고 했다. 박스클럽 회원사는 2013년까지만 해도 24개였으나 올해 16곳으로 줄었다. 한진해운 사례에서 보듯 구조조정 과정에서 시장에서 퇴출 또는 인수합병(M&A)되는 해운사가 계속 나오고 있어서다.

'첩첩산중' 현대상선 정상화

최근 세계 해운시장에선 반도체 분야에서와 마찬가지로 치킨게임 양상이 나타나고 있다. 과거엔 업황이 좋으면 규모가 작은 회사도 이익을 나눠가졌지만, 지금은 경쟁력이 앞선 해운사들이 이익의 대부분을 가져가는 구조로 바뀌었다. 대형 해운사들이 더 적극적으로 M&A에 나서고 있는 배경이다.

이미 세계 1위 컨테이너선사인 덴마크 머스크는 독일 함부르크수드를, 3위인 프랑스 CMA-CGM은 싱가포르 APL을 각각 인수하며 규모를 더 키웠다. 4위 중국 코스코(COSCO)의 홍콩 OOCL 인수와 5위 독일 하팍로이드의 아랍에미리트 UASC 합병, 일본 컨테이너 3사 간 통합도 ‘규모 키우기’라는 같은 목적에 따라 이뤄졌다.

한진해운이 파산한 뒤 유일한 원양 국적선사로 살아남은 현대상선은 위기감이 크지만 속수무책인 처지다.

한국의 세계 물동량 점유율은 올 들어 7월까지 5.7%로, 지난해 상반기의 절반 수준으로 떨어졌다. 경영컨설팅을 진행한 AT커니는 현대상선이 생존하려면 대형 선박 등을 확보하는 데 2022년까지 10조원 이상을 투자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해운 구조조정을 마무리하려면 정부가 다시 나설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그러나 정부 내에선 별 움직임이 안 보인다.

지연되는 산업 체질개선

한계기업 정리와 산업 체질개선이 시급한 과제인데도 정책 우선순위에서 뒤로 밀리고 있는 데 대한 비판이 적지 않다. 산업경쟁력을 키우려면 시장경쟁 질서를 흩뜨리는 부실기업을 하루빨리 솎아내야 하지만 아무도 나서지 않는다는 것이다. 정리해고 등으로 인한 노조와 지역사회 반발을 고려할 때 내년 6월 지방선거 때까지는 부실기업 구조조정이 이뤄지기 힘들 것이라는 추측까지 나돈다.

당장 조선업계가 해외 시장에서 벌이고 있는 ‘제 살 깎아 먹기’식 수주 경쟁은 구조조정 지연에 따른 피할 수 없는 결과다.

박근혜 정부는 산업은행 등 국책은행 동반 부실화에 대한 우려 때문에 부실 조선사의 연명을 돕는 데 급급했고, 문재인 정부에서도 한계 조선사 처리가 늦춰지고 있다. 이로 인해 채권단 자금으로 살아남은 기업과 정상기업이 뒤섞여 과당 수주 경쟁을 벌이는, 불공정한 게임이 진행되고 있다. 업계에서 공멸의 길로 가고 있다는 하소연이 나온 지 오래다.

한계기업 퇴출은 산업생태계의 선순환을 위해 꼭 필요하다. 1997년 외환위기나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등 과거 경험에서 볼 때 구조조정이 지연되면 큰 위기를 맞는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금리 인상이 초읽기에 들어간 가운데 산업 체질개선과 구조 개혁이 미비하다는 지적이 잇따르고 있다.

김수언 논설위원 sookim@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