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엔 '일 · 가정 양립'으로 소개된'Work/Life Balance'가 선진국을 중심으로 다시금 조직 내 화두로 떠오르고 있음은 주목할 만하다. 처음 일 · 가정 양립이 이슈화되던 시기엔 '일하는 엄마'가 정책의 주요 타깃이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일하는 엄마들이 낮엔 직장 일,저녁엔 가사와 양육을 전담하게 되면서 이중역할부담의 과중함을 이기지 못해,결국은 경력단절의 희생을 감수하거나 아니면 자신의 커리어와 출산을'빅딜'하는 결과를 가져왔음은 익히 알려져 있다.

실제로 한국여성의 연령별 취업률 곡선을 보면 뚜렷한 M자형을 그리고 있다. 취업률이 하강 곡선을 그리는 시점은 여성의 생애주기상 출산과 양육에 몰입하게 되는 20대 후반부터 30대임은 물론이다. 이 때 자신의 커리어를 포기할 수 있는 선택권(?)을 가진 여성들은 대체로 저학력 · 저소득층이라기보단 고학력 전문 인력임을 간과해선 안 될 것이다.

나아가 국가적 차원에서 준(準)비상사태에 이르렀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저출산 상황도 일하는 여성의 과중한 역할부담이 한 몫 단단히 했음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여성의 학력이 높을수록 임금 수준이 높을수록 출산률은 저하된다는 지난달 통계청 보고를 떠올린다면,일하는 엄마들의 고충을 충분히 이해하고도 남음이 있을 게다.

이러한 상황에서 일하는 여성들의 경력단절을 예방하고 저출산의 위기를 돌파하기 위한 방안으로 일 · 가정 양립을 도모할 수 있는 다양한 가족친화 정책이 각광을 받기 시작했다. 한데 얼마간 시간이 지나면서 일 · 가정 양립에는 강력한 제동이 걸리기 시작했다. 곧 일 · 가정 양립이 일하는 엄마의 어깨 위에만 부과되는 건 부당하고,일하는 아빠에게도 필수여야 한다는 주장이 지지 기반을 넓혀가게 된 것이다.

물론 서구에서도 일하는 아빠를 위한 가족친화 정책이 입안되던 초기엔 저항이 만만치 않았다. 그러나 머지않아 분위기는 반전되어 아빠를 위한 출산 휴가,자녀 병가,나아가 육아 휴직제를 선택하는 남성들이 급증하기 시작했음은 물론,남성들도'일 우선 이데올로기'에서 벗어날 때만이 '산업시간'(industrial time)에 밀린 '가족시간'(family time)의 희생을 복구하는 동시에 아빠 자신의 삶의 질을 높일 수 있으리란 주장이 설득력을 얻어가기 시작했다.

한 가지,일하는 아빠들을 타깃으로 일 · 가정 양립이 주요 화두로 등장하게 된 배경에는 초고령화가 자리하고 있음을 기억할 일이다. 평균 수명은 80세를 향해 치닫고 있는데 퇴직 연령은 상대적으로 빨라지는 역설적 상황에서,50대 중반 은퇴한 남성들의 삶에 전례를 찾기 힘든 위기가 닥치고 있는 것이다. 지금까지 가족을 위해 일한다는 명분하에 '일 중독'에 빠져 살았으나,정작 돌아와 보니 가족 안에 아버지의 자리도 남편의 자리도 부재(不在)한 현실에 직면하면서,남성들의 소외감이 깊어만 가고 있음에랴.

시중에 떠돌아다니는 이야기 중 한국 남성들의 성공적 노후를 위해 필요한 건 "첫째 아내,둘째 집사람,셋째 처,넷째 와이프"란 우스갯소리가 있는가 하면,은퇴한 남편 존경하기는'미션 임파서블'이란 농담도 들려온다.

실상 일 · 가정 양립은 개별 기업이나 가족 수준에서 실행 가능한 프로그램이 아니다. 공사(公私)영역 간 관계의 틀을 재구조화하는 노력을 수반해야 하는 과제이자,삶의 우선순위 및 가치를 재조정해야 하는 문제다. 이제 글로벌 스탠더드를 위해 벤치마크해야 할 대상은 생산성,효율성,품질 향상,가격 경쟁력만이 아니다. 'Work/Life Balance'를 위해 지난 50여년간 선진국이 꾸준히 시도해온 시행착오와 그로부터 얻어낸 값진 열매도 타산지석으로 삼아야 할 게다.

함인희 <이화여대 교수ㆍ사회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