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ICT 생태계 발전을 위한 변론
요즘 정보통신기술(ICT) 업계 역시 경제민주화 논리에 휩싸여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는 듯하다. 어떻게 창조적으로 ICT 생태계를 키울 것인가에 대해 고민하기보다는 시장의 약자인 ‘을’을 보호해야 한다는 갑을논리에 매몰돼 가는 느낌이 든다. 자유시장경제에서 갑을관계는 용어를 어떻게 바꾸든 사라질 수가 없는 거래당사자 간의 관계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언론과 정치인, 관료가 서로 앞다퉈 갑을관계를 없애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는 명칭변경이나 규제를 통해 본질을 바꿀 수 있다는 순진무구한 생각이다. 갑을관계에서 을의 지위는 을의 역량이 커져야 근본적으로 개선이 가능하다. 즉, 정부는 대증적 대책으로 계약의 내용이나 형식을 규제하기보다는 을의 역량을 어떻게 강화할 것인가에 정책적 노력을 집중해야 한다. 이게 바로 창조적인 접근법일 것이다.

정권 초기 시작된 갑을바람이 이제 ICT 생태계에도 거세게 불어닥치고 있다. ‘이동통신단말장치 유통구조 개선에 관한 법률안’이 대표적인 사례다. 갑을논쟁을 등에 업은 규제만능 바람은 대중의 판단을 호도하기 위해 ‘보조금이 부당하게 차별적이다’ ‘휴대전화 가격이 높아 가계에 부담이 된다’ 등 선동적 구호를 앞세워 ICT 생태계를 짓누르고 있다.

“차별적인 보조금 지급은 소비자 후생배분을 왜곡하고 이통시장의 건전한 발전을 저해”하기 때문에 단말기별로 동일 보조금 제도를 도입하고 그 외의 차별을 금지하려고 한다(법률안 제4조). 기업의 가격차별화 전략이 기업이윤만 증가시키는 것이 아니고 소비자 후생도 증가시킨다는 것은 경제학의 상식이다. 가격차별화가 없었으면 구매할 수 없었던 상품이나 서비스를 가격차별화를 통해 소비자가 구매할 수 있게 되면서 생산자도 좋고 소비자도 좋은 것이다.

제3조에 따르면 가입유형과 나이에 따른 가격차별을 금지하고 있다. 영화관 학생할인, 각종 노인할인이 존재하는데 도대체 통신산업에서만 나이에 따른 가격차별을 규제할 이유가 무엇이고 지구상에 몇 나라가 그런 것까지 규제하는지 궁금하다. 영업 마감시간에 슈퍼의 야채 등 음식떨이 판매도 시차를 이용한 가격차별화 전략으로서 소비자 간 후생배분을 왜곡시킨다고 금지할 것인가?

고급 휴대전화가격이 90만원대다 보니 가계에 부담이 될 수는 있다. 문제는 가격이 높다고 기업을 비난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제품의 가격은 생산단가라는 공급측면뿐만 아니라 시장수요 요인에 의해서도 영향을 받기 때문이다.

아울러, 첨단 신제품은 상품의 생애주기에 걸쳐 가격이 빠르게 변한다는 것이 상식이다. 첨단제품은 제품개발 초기에 높은 가격으로 고소득자를 대상으로 우선 판매가 이뤄지고 그 시장이 포화되는 단계에 다다르면 보다 낮은 지급의사를 갖는 소비자에게 판매되는 과정을 거치는 것이다.

인위적으로 정치인이나 정부가 휴대전화 유통시장의 전체 가치사슬에 개입해 제조원가부터 보조금에 이르기까지 미시적으로 가격결정 과정에 개입하려는 것은 전형적인 과잉규제이다. 만약 삼성전자가 독점적 사업자라면 독점규제차원에서 그런 개입을 정당화할 수도 있다. 하지만 강력한 경쟁자인 애플이 있고 LG전자와 해외 유수 업체들이 있다. 현실을 언제까지 외면하겠다는 것인가.

불법적인 독점화가 문제이지 기술발전 과정에서 자연히 발생하는 시장집중은 그 자체가 비난받아야 할 대상이거나 비효율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좋은 예가 마이크로소프트사(MS)가 윈도 운영체제에 인터넷 브라우저를 기본 탑재한 것에 대한 소송이다. 수년간 소송 끝에 기본탑재가 허용됐으나 10여년이 지난 지금 인터넷 브라우저 시장에서 MS 익스플로러의 세계시장 점유율은 지난해 30% 이하로 하락했고 크롬에 1위 자리를 내주었다.

ICT 생태계는 불과 몇 년 앞을 내다보기 힘들 정도로 혁신이 빠른 시장이고, 인터넷은 국경이 없는 전 세계를 대상으로 한 시장이다. 국내의 좁은 갑을관계라는 편협한 시각에서 ICT 생태계를 재단하고, 동태적 기술진보를 보지 못한 채 하향 평준화하려는 우를 새 정부가 범하지 않기를 기대해 본다.

권영선 < KAIST 경영과학과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