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기 219년 조조는 현 산시성 남부의 한중 땅을 되찾으려고 유비와 전투를 벌인다. 처음엔고전했으나 손권을 끌어들여 촉한의 명장 관우를 죽이도록 한 다음 전세를 뒤집었다. 이듬해 낙양에 도착한 조조는 병세 악화로 죽음을 직감하자 측근들에게 "천하가 아직 평정되지 않았으니 장례 규정을 모두 따를 수는 없다… 염습 때 평상복을 사용하고,보물을 넣지 말라"고 유언했다고 한다. 삼국지 위서 무제(三國志 魏書 武帝)조에도 '매장은 반드시 척박한 땅에 하라…봉분을 만들지 말고 나무도 심지 말라'고 했다는 내용이 들어 있다.

대다수 왕들이 사후에도 현세의 영화를 누리기 위해 큰 무덤을 만들고 많은 부장품을 넣도록 했던 것과는 전혀 다르다. 심지어 산 사람을 순장하는 경우도 있었던 점을 감안하면 파격이라 할 만하다. '독사여도비고''독사방여기요' 등 명나라 말에 편찬된 책들에는 조조가 72개나 되는 의총(疑塚 · 가짜 무덤)을 만들도록 했다는 얘기가 실려 있다. 난세에 천하를 평정한 처세의 달인답게 호화분묘가 도굴될 것을 미리 짐작하고 대처했던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72개 의총에 도굴꾼들이 들끓었으나 모두 다른 사람들의 분묘로 드러났고,조조의 무덤은 수수께끼로 남아 있었다.

하지만 사실은 밝혀지게 마련인 모양이다. 중국 허난성 문물국이 허난성 안양(安陽)현 안펑(安豊)향 시가오쉐(西高穴)촌에 있는 분묘를 발굴하는 과정에서 조조의 '진짜 무덤'을 확인했다는 소식이다. 이 무덤도 여러 차례 도굴됐지만 '위 무왕(조조)이 사용하던 창' '위 무왕이 사용하던 돌베개' 등의 명문(銘文)이 발견됨으로써 고고학자들이 조조의 무덤으로 결론내렸다는 것이다. 장례를 간소하게 치르게 했던 유언과도 맞아떨어진다고 한다.

조조는 '삼국지연의'에서 부정적으로 묘사된 이후 '간웅'의 대명사처럼 여겨져 왔으나 근래 들어 남다른 지략과 판단력을 지닌 인물로 재조명 받고 있다. 1800년 가까이 비밀에 싸여 있던 무덤까지 발견됐으니 조조 연구가 더 탄력을 받을 게 틀림없다. 사마열인이라는 중국학자가 '조조의 면경(面經)'이란 책에서 정리한 처세법 중에는 이런 내용이 있다. '내가 세상을 버릴지언정 세상이 나를 버리게 하지 않는다''진정한 능력은 마음을 다스리는 데서 나타난다'….조조에 대한 평가야 어떻든 그의 처세법을 잘 활용하면 요즘처럼 어수선한 세상을 헤쳐나가는 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이정환 논설위원 jhle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