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자공학자들은 전자공학을 가리켜 '6개월 학문'이라고 부르곤 한다.

5년이든 10년이든 아무리 열심히 연구해 일궈놓은 성과라 해도 6개월만 지나면 새로운 성과에 의해 '구닥다리'가 되기 일쑤라는 뜻에서다.

성단근 한국과학기술원(KAIST) 전자전산학과 교수(54)는 "교수들이 대학원생들에게 추월당하지 않을까 항상 긴장하는 분야가 전자공학"이라며 "'강자'가 워낙 빨리 바뀌어 저명한 학자라는 말도 웬만해서는 쓰지 않는다"고 말했다.

우리나라가 지난해 생산량 기준 메모리반도체 1위,디스플레이 1위,무선통신기기 2위의 정보기술(IT) 강국으로 성장한 것은 선진국 과학자들의 연구 성과를 구닥다리로 만드는 세계적인 성과를 일군 한국 전자공학자들의 공로에서 비롯됐다는 평가다.

한국 전자공학자들은 현재도 '세계 최초 제조기' 노릇을 톡톡히 하며 한국 IT산업의 발전을 이끌고 있다.

그 선두에는 최양규 KAIST 전자전산학과 교수(40)가 자리잡고 있다.

최 교수는 올초 기존 실리콘 소재 반도체의 사용 수명을 20년 이상 연장할 수 있는 전자소자(트랜지스터)를 개발해 세계 IT계의 시선을 집중시켰다.

이 트랜지스터는 실리콘 소재 반도체의 최소 한계로 불리던 5㎚(1㎚는 10억분의 1m)를 훌쩍 뛰어넘는 3㎚ 크기로 지금까지 나온 최소 크기의 실리콘 소자다.

반도체 업계에서는 그동안 '5㎚벽'을 넘기 위해서는 탄소나노튜브나 분자소자를 사용해야 할 것으로 전망해 왔으나 그는 실리콘 소자만으로도 가능함을 세계 최초로 보여줬다.

최 교수는 이 기술이 상용화되면 현재보다 25배 빠른 컴퓨터가 등장할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그는 "실리콘 소자로도 '18개월마다 집적도를 2배 늘릴 수 있다'는 무어의 법칙을 향후 20년 동안 유지시킬 수 있게 된 것"이라며 "2015년께 480조원으로 예상되는 세계 반도체 시장에서 이 3㎚급 트랜지스터가 약 35%(168조원)를 차지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최 교수는 하이닉스반도체에서 7년 동안 연구원으로 근무한 '실전파'다.

서울대 물리학과 출신인 그는 대학원 시절 이론물리학으로 석사학위까지 받았으나 입사 후에는 이론이 아닌 실험연구에서 두각을 나타내 이 회사의 64메가 D램 개발을 주도했다.

반도체를 학문으로 연구키로 한 그는 1999년 미국 UC버클리 전자공학과로 유학을 떠나 이곳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최 교수는 "현재 나노반도체를 이용한 바이오센서도 개발 중"이라며 "이 기술이 상용화되면 술 먹은 다음날 간이 얼마나 나빠졌는지 집에서 바로 센서로 확인할 수 있게 된다"고 말했다.

반도체 분야에서는 최 교수와 함께 박병국 서울대 교수(47)가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

그는 2003년 삼성종합기술원과 함께 플래시 메모리용 30㎚급 실리콘 소자를 개발했다.

이 소자는 2010년께 상용화돼 디지털 카메라,휴대폰,PDA 등의 소형화에 크게 기여할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서광석 서울대 교수(51)는 지난 1월 기존 실리콘 소자보다 전송 속도가 2배 이상 빠른 초고속 광통신 시스템용 소자를 개발해 주목받았다.

이 소자는 국책연구기관인 나노소자특화팹센터에 기술 이전돼 상용화가 진행 중이다.

디스플레이 분야에서는 황기웅 서울대 교수(56·서울대 디스플레이연구센터장)가 선도하고 있다.

그는 현재 250~300W 수준인 PDP의 소비전력을 200W 밑으로 떨어뜨리는 기술을 지난해 개발해 국내 기업에 이전했다.

이르면 내년께 이 기술이 상용화될 경우 PDP TV 소비전력은 LCD TV보다 낮아질 전망이다.

권오경 한양대 교수(51)는 원하는 신호를 정확히 전달시키는 TFT-LCD용 10Bit 구동회로를 개발했다.

이 구동회로는 내년에 삼성전자가 양산할 계획이다.

정보통신 분야에서는 임기홍 포스텍 교수(49)가 대표 인물로 꼽힌다.

임 교수는 대역폭을 효율적으로 이용하는 새로운 디지털 전송 방식인 'CAP' 방식을 개발해 1996년 국내 학자로는 처음으로 미국 전기·전자기술자협회(IEEE) 통신분야 최우수논문상을 수상했다.

성단근 교수는 이동데이터 통신시스템에서 기존의 수용 가능한 데이터통신 가입자 수를 획기적으로 늘릴 수 있는 '직교부호·자원 도약 다중화방식 기술'을 개발했다.

그는 이 연구로 2004년 과학기술부로부터 과학기술자상을 받았다.

반도체 등 하드웨어 분야에 비해 기술력이 취약한 것으로 평가받아온 소프트웨어 분야에서도 한국인 전자공학자들이 점차 성과를 내고 있다.

김광회 미국 캘리포니아대(UC) 어바인 캠퍼스 교수(59)는 유비쿼터스 관련 실시간 처리 프로그래밍 기법을 개발해 지난해 IEEE로부터 '쓰토무 가나이상'을 받았다.

쓰토무 가나이상은 전 일본 히타치그룹 회장의 이름을 따 1995년 제정된 상으로 한국인 가운데서는 김 교수가 유일하게 수상했다.

신강근 미국 미시간대 석좌교수(60)도 세계적인 소프트웨어 학자로 꼽힌다.

그는 휴대용 정보 단말기(PDA),휴대폰 등 소형 전자제품에 사용되는 저전력 실시간 운영체제(OS) '에메랄드'를 개발했으며 OS 관련 교과서인 '리얼 타임 시스템'(미국 맥그로힐 출판사)을 저술했다.

임도원 기자 van7691@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