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96년 여름 필자의 한 후배는 다니던 은행을 그만 두고 강남의 집을 팔아 미국으로 MBA 유학을 떠났다. 그로부터 2년 뒤 이 후배는 '개선장군'으로 귀국했다. 나갈 때보다 아파트값은 반으로 폭락했고,달러값은 거의 두배가 됐으며,안정적이라고 생각했던 은행의 많은 직장동료들은 강제퇴출 당했다. 거꾸로 본인은 연봉 1억원이 넘는 외국계 컨설팅회사에 취업됐다. 결과적으로 미국에 가 좋은 환경에서 자녀들 교육 잘 시키고,환차익으로 인해 거의 공짜로 유학하고 돌아와 전보다 15평이나 넓은 아파트로 이사하는 행운을 누렸다. 물론 이와는 정반대의 경우도 많다. 우리나라 경제를 좋게 말하면 '다이내믹해서 운 좋은 자에게는 고수익 창출의 기회가 많다'고 하겠고,비판적으로 이야기하면 '변동성이 너무 커서 투기꾼이 설치는 불안정한 경제'라고 할 수 있다. 우리 경제가 모든 지표면에서 변동성이 큰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대부분 경제전문가들이 지적하듯,우리나라가 소규모경제로서 외부충격에 과민하게 반응하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부인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관치(官治)의 영향이 절대적으로 작용하고,그 관치의 목표는 항상 단기적 성과에 두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 또한 부인하기 어렵다. 관치는 가격기능보다 자신들의 통제와 조정 기능이 더 효율적이라고 믿는다. 때문에 겉으로는 가격기능을 신봉하고 시장이 실패할 때에만 정부가 개입하는 것처럼 이야기한다. 하지만 사실은 정부가 대리인을 통해 시장에 군림,제대로 작동하지 못하게 해 '정부실패'가 많은 것이 현실이다. 정부는 또 은행·공기업 임원을 선임할 때 시장에서 평가하는 사람보다 자신들의 통제에 순종적인 사람을 앉혀 놓아야 안심하는 속성을 갖고 있다. 최근의 부동산 대란도 따지고 보면 관치의 산물이다.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 이후 천문학적 공적자금이 투입된 기업 및 금융 구조조정으로 인해 단기적 성과에 조급해진 관치는 일단 경기부양과 금융회사의 수익성 창출을 위해 인위적으로 초저금리를 유지했고,금융회사들은 총 여신의 60% 이상을 개인대출로 하는 마케팅 전략을 폈다. 이는 관치형 경기부양의 최첨병인 건설산업 부양책과 맞물려 주택 인프라가 가장 좋다는 서울의 강남아파트 가격 폭등을 유발했다. 산이 높으면 골이 깊다고 했다. 잇단 초강력 부동산대책으로 거품이 꺼지면서 이제는 자산 디플레 우려가 나온다. 이러한 현상은 부동산시장에 국한된 것이 아니다. IMF 외환위기 이후 개인의 소비를 진작시키기 위해 신용카드회사를 매개로 현금서비스한도 확대를 통해 외상지출을 장려했다. 그 결과 카드사들의 마구잡이 카드발행과 보급은 카드빚 돌려막기 사태까지 빚어내 흉악범죄 유발의 간접원인으로 지목되고 있다. 지난 9월 말 개인 신용불량자는 2백45만명을 돌파하는 '신기록'을 수립했다. 현재 우리의 가계부채는 GDP(국내총생산) 대비 80%에 육박해 신용거품이 붕괴될 경우 경제적 혼란을 야기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할 것이라는 우려가 높다. 차입가구당 평균 대출금액이 5천여만원에 달해,가구당 연간 가처분소득인 2천7백만원의 2배에 육박하고 있기 때문이다. 만일 이라크 전쟁이 발발,유가가 급등하고 물가가 앙등해 금리인상을 미룰 수 없게 된다면,IMF 외환위기 당시의 기업부실채권으로 거덜난 금융권이 이번엔 가계부실로 인해 곤경에 빠질 위험성이 크다. IMF 지원을 받은 1백10개국 중 다시 외환위기에 처한 경우는 48.2%,IMF 구제금융을 두번 받은 경우는 82.5%나 됐다. 우리나라 경제가 또 위기를 맞지 않기 위해서는 경제주체들이 가격이 주는 신호에 따라 유연하게 적응할 수 있는 '진정한 시장경제체질'로 하루빨리 개선돼야 한다. 따라서 정부는 무엇보다도 가격기능을 신뢰하고 솔선하며,개인과 기업들이 가격이 주는 신호를 위배하지 않고 질서에 순응하도록 하는 '감시자의 역할'에 더욱 충실할 것이 요구되는 것이다. ykwon@khu.ac.kr -------------------------------------------------------------- ◇ 이 글의 내용은 한경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