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글 홍상화 ]

"방금전 긴급구제금융 지원을 요청했다는 부총리의 담화문이 발표되었는데 들으셨는지요?"

이현세 이사가 진성호에게 물었다.

"아니요, 못 들었어요"

진성호는 올 것이 드디어 왔다는 생각에 마음이 오히려 편안해졌다.

지난 수개월 동안 외환위기설로 뒤숭숭한 분위기 속에서 회사운영은 오히려 갈피를 못 잡고 방황하는 분위기였다.

"발표문을 읽어드릴게요"

이현세가 발표문을 읽어내려갔다.

"마지막 구절을 다시 읽어보세요"

이현세가 부총리의 발표문 전문을 다 읽자 진성호가 요청했다.

"…IMF 자금지원과 함께 정부.기업.금융기관.근로자 등 모든 국민이 합심협력한다면 우리 경제가 조속한 시일 내에 정상궤도에 진입할 것으로 확신합니다. 국민 여러분의 이해와 아낌 없는 협조를 당부드립니다"

이현세가 읽기를 마쳤다.

진성호는 ''우리 경제가 조속한 시일 내에 정상 궤도에 진입할 것이다''라는 문구에 표현된 ''조속''이라는 단어는 기업체로서는 생사를 판가름내기에 충분한 기간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이 이사, 지금 그룹 사장단 전원에게 연락하여 월요일 2시에 회의를 소집하세요. 오늘이 금요일이니까 주말 동안 각사의 구조조정안을 준비하여 월요일 회의에서 발표하도록 하세요"

"모기업도 포함됩니까?"

"대해실업은 황무석 부사장에게 준비하라고 하십시오"

"알겠습니다.…그리고 좋은 소식이 있었습니다. 방금전 세브란스 병원에서 회사로 연락이 왔었습니다. 회장님 핸드폰이 안 된다고요.
이정숙 교수께서 처음으로 부분적인 의식 회복의 반응을 보였다고 회장님께 전해드리라고 했습니다"

"알겠어요. 민 박사한테 전화연락을 하지요"

진성호는 이현세와 통화를 끝낸 후 즉시 민 박사에게 전화를 걸었다.

다행히 늦은 시간인데도 통화를 할 수 있었다.

민 박사의 얘기인즉 이정숙이 아주 작은 부분적인 의식회복의 기미를 처음으로 보였으나 아직 불안정한 상태라 그 사실만 알려주고 싶어 연락을 했다는 것과, 환자가 어떤 충격을 받지 않은 상태에서 며칠간 진전 과정을 관찰하는 것이 필요하므로 빨라도 다음주 화요일 아침에나 면회가 가능하다는 것이었다.

진성호는 가벼운 마음으로 화장실로 갔다.

그러나 그곳에서 일을 보면서 아내가 부분적으로 의식회복 기미를 보인다는 기쁜 소식은 사라지고 화가 치밀어 올랐다.

소위 ''한강의 기적''이라 일컫는, 인류 역사상 전례를 찾을 수 없는 한 세대만에 산업화에 성공한 한국의 경제발전은 이제 물거품이 되었다는 느낌이 들었다.

방만함을 진정한 민주주의로 착각한 일반 국민의 잘못된 사고방식,그러한 사고방식이 잘못된 것인 줄 알면서 부추긴 위선덩어리인 정치인과 지식인들, 자신만 살아남자고 무분별한 선심정책을 편 약아빠진 지도자와 현실로는 존재하지 않는 이상적인 지도자가 저지른 수많은 인기정책….

진성호의 가슴에 분노가 불길처럼 치솟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