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홍상화

차가 네거리에서 정지하자 차창을 통해 보이는 전광판의 뉴스 속보에 진성호의 시선이 갔다.

테레사 수녀의 장례식이 내일 거행될 예정이고,신한국당과 국민회의가 12월의 대선에 대비해 선심.인기성 공약을 남발하고 있음을 알려주었다.

경제뉴스에서는 주식시장은 700선 탈환에 실패했고,금년도 무역적자가 200억에 달하리라는 것도 알려주었다.

1988년 서울 올림픽이 열렸던 해만 해도 150억 달러의 무역흑자를 기록했던 경제가 어쩌다 그 짧은 기간 동안 이 지경에 이르렀는지 진성호는 답답한 마음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

신호가 바뀌었다.

진성호는 네거리를 지나 남산 1호터널 안으로 들어갔다.

그의 뇌리에는 방금 전 본 전광 뉴스 속보판의 잔영이 여전히 남아 있었다.

내일 저녁 이맘 때면 "대해실업 주가조작 발각.진성호 회장 긴급구속"이라는 뉴스가 전광되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초조함과 불안감이 다시 찾아와 그를 괴롭혔다.

문득 지금은 경영 일선에서 물러났지만 재벌기업으로 키우는 데 주도적 역할을 한 어느 선배의 말이 떠올랐다.

"내가 기업을 키우면서 원한 건 딱 한 가지밖에 없었어.그것은 내가 자연사하는 거였어"

자연사를 인생의 목적으로 삼는 기업인은 오로지 한국에서만 있을 수 있는 일이고,자신이 지금 경험하고 있는 초조함과 불안감이 자연사를 방해하는 원인이고,그것은 불법을 저지르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는 한국의 기업풍토 때문이라고 진성호는 마음속으로 결론지었다.

문득 자연사가 인생의 목적이었던 그 선배는 초조함과 불안감을 어떻게 견디어냈는지 진성호는 궁금해졌다.

운동을 하면 된다는 것은 좁혀오는 법망의 집요함을 모르고 한 말이고,사랑하는 가족이나 친구가 있다 하더라도 그들과 같이 있는 것은 그들에게 불안을 전염시킬 뿐이리라고 그는 결론지었다.

그럼 무엇이 있을까?

진성호는 고개를 뒤로 젖히며 자신에게 물었다.

"그렇다,여자와 술...현실을 망각하게 하고 시간의 흐름을 빠르게 하는 것은 여자가 보내는 슬픔에 젖은 흠모의 눈길과 신경을 마비시키는 독한 술 이외에 이 세상에 무엇이 있단 말인가!"

나에게 슬픔에 젖은 흠모의 눈길을 줄 수 있는 여자를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그는 다시 질문을 던졌다.

R호텔?

이미지가 노래하는 R호텔로 가기로 했다.

이미지가 지난주 그에게 보인 눈물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20분 후 한가해 보이는 레인보우 클럽 안으로 들어서면서 진성호는 피아노가 놓여 있는 무대로 시선을 보냈다.

이미지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무대 옆 소파에 앉았다.

"안녕하셨어요?"

진성호는 소리나는 곳으로 뒤돌아보았다.

이미지가 미소지으며 다가왔다.

"미국에서 언제 돌아오셨어요?"

이미지가 소파에 앉으며 말했다.

"오늘 귀국했어요... 나는 오늘밤 내내 깨어 있어야 해요"

"왜요?"

"내 회사의 생사가 달려 있는 일이 오늘 밤 안에 결판이 나게 되어 있어요. 뜬눈으로 소식을 기다려야지요"

진성호가 핸드폰을 꺼내 보이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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