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SRI 한국위원회 주도 ]

1969년10월27일 오후 8시.

김포출입국관리소로부터 긴급 전화가 걸려왔다.

"전경련에서 외국 손님을 청했습니까"

"예. 29일부터 한미민간합동회의가 있는데요"

"지금 공항에 벡텔(Bechtel) 회장이라는 분이 10여명을 대동하고 자가용
비행기로 착륙했소. 문제는 이들이 입국사증(visa)도 없고 예방검역증도
없소. 어떻게 하지요"

출입국 관리소장이 매우 난감해했다.

필자는 "그분은 미국측의 주요인사(VIP)이므로 지체없이 입국시켜 주기
바랍니다"고 말했다.

"아무리 VIP 라도 비자는 있어야지요"

그래서 관리소장의 요구대로 전경련 초청장, 제1회 한미민간경제회의 일정
등 관련 서류를 준비, 담당 직원을 김포공항에 급파했다.

돌이켜보면 어처구니없는 해프닝이었다.

"한미민간합동회의" 미국측 추진조직은 "SRI International"이다.

SRI(Stanford Research Institute)가 후원회원으로 전세계 굴지의
기업인들을 규합, 이 단체를 구성한 것이다.

이 조직의 창립자는 깁슨(W Gibson) 박사였다.

이분은 90이 넘은 고령이지만 지금도 필자와 연락을 주고 받는다.

이분과 필자는 1969년10월29일부터 11월1일까지 4일간 서울 워커힐(지금의
쉐라톤워커힐호텔)에서 한미민간합동회의를 조직했다.

의제는 "전환기에 선 한미경제협력과 민간기업의 역할"이었다.

물론 주요 토의주제는 투자유치 및 수출증진이었고 "마산수출자유지역"
구상도 상세히 논의했다.

한.미간 첫 민간협력회의인 만큼 양국 경제계는 물론 언론의 관심도 컸다.

미국측은 벡텔 회장, 리먼 브러더스 사장, 록히드항공 사장 등 70여명의
거물급 경제인이 참석했다.

SRI를 한국에 처음 소개한 것은 천우사 전택보 사장이다.

전 사장은 필자가 전경련 사무국장으로 취임하자 SRI 와 연계를 가질 것을
권했다.

전 사장은 SRI의 국제고문이며 이미 1956년에 스페인 마드리드 회의에 참가
했었다.

그후 SRI 마닐라 회의에 전택보 사장, 주요한 사장 그리고 필자가 참석했다.

마닐라 회의에는 SRI가 그동안 결성해 놓은 ASEAN(동남아국가연합)의 추진
주역인 PBEC(Pacific Basin Economic Council. 태평양경제협의회), SRI-
자카르타, SRI-싱가포르 등 동남아 각국 관련 경제인들이 대거 참석했다.

이후 전택보 사장과 필자는 전경련 주요회원 20명을 SRI International
회원으로 가입시켰다.

또 이들을 비롯한 77명으로 1969년7월25일 " SRI 한국위원회"를 결성한 후
위원장에 전택보, 간사장에 필자를 선임했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SRI 한국위원회"는 SRI International과 공동으로
"제1회 한미민간경제합동회의"를 개최하게 된 것이다.

이 합동회의를 통해 필자는 물론 한국측 참가자들은 많은 것을 얻었다.

필자만 해도 깁슨 박사의 해박한 국제지식, 세계적인 넓은 인맥, 능란한
회의 진행 솜씨 등 배울 것이 한두가지가 아니었다.

특히 회의진행, 합동회의결과를 영문으로 정리하는 방법, 공동성명 작성
등을 전경련 사무국 직원들도 많이 배웠다(1969년 전경련사업보고서 pp.2백49
~2백61 참조).

깁슨 박사는 PBEC 창립자이자 그 사무총장직을 맡고 있었다.

깁슨 박사를 통해 필자는 전경련을 PBEC 과 연결시켰다.

웃지 못할 실패담도 있다.

전경련 환영 만찬때 벡텔 회장 부부 테이블에 필자가 동석했다.

당시에는 이렇다할 국산 와인이 없었다.

다만 사과 와인이 개발됐다고 TV 등에서 꽤 선전하고 있을 때다.

필자는 애국심을 발휘해 소위 국산 "사과 와인"을 열심히 자랑하고 부인께도
권했다.

그리고 "와인 맛이 어떠냐"고 물었다.

부인은 우아하게 "Very good"이라고 했다.

나중에 와인을 아는 이에게 이 말을 자랑삼아 얘기하자 "이봐! 그건
사과주스지 와인은 아니야"라고 말했다.

얼마나 창피한 얘기인가.

이 모두 가난을 벗으려고 발버둥치던 때의 실패담이다.

< 전 전경련 상임부회장 >


( 한 국 경 제 신 문 2000년 2월 14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