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호가 공동소리를 힘껏 울린 것은 18일 오후 5시45분이었다.

갑판에 나와 때를 기다리던 8백84명의 승객은 일제히 환호성을 질렀다.

금강호의 첫 출항이 뜻하는 자기 나름의 역사성과 꿈의 실현을 자축하며
모두들 가슴이 벅한 표정이었다.

배가 움직이기 시작하자 승객들은 입을 다물었다.

감격에 겨워 말이 안 나오거나 이번에 동행하지 못한 사람들을 생각하여
말을 삼가거나 하여 잠깐 틈새가 생긴 것 같았다.

왜 아니 그렇겠는가.

나같은 이남 토박이도 보는 사람마다 "좋겠다"고 하는 인사를 수도 없이
들었는데, 하물며 혈육과 고향을 두고 와 고통과 향수에 찌들다 지레 늙은
실향민들이야 말해 무엇하겠는가.

4박5일짜리 선상생활의 첫 공식 행사이기도 한 저녁 식사시간이 되자 다들
먹성스럽게 양껏 드는데, 어느 자리고 없이 한결같이 들뜬 표정으로
왁자지껄한 것이 갈데없는 잔치판이었다.

말이야 바로 말이지 오늘이 어떤 날인데 오늘 같은 날 식탁문화를 찾을까
보냐.

그런대로 넘어가게 그냥 눈감아 달라는 분위기였다.

텔레비전에서는 파도가 높을 것이라고 누누히 이르며 적정했지만 배는
덩치값을 하느라고 자못 유유하였다.

배는 새벽 2시45분에 군사분계선을 넘어 더이상은 물밑에 걸림돌이 없음을
여봐란듯이 증명하였다.

어느덧 북한 사람이 배에 올라와 환영 인사말에 이어 밖에 대고 함부로
사진을 찍지 말라는 주의 방송을 했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어디에 와 있는가를 비로소 실감하게 되었다.

이윽고 햇살이 퍼지면서 북한 사람들이 "별금강"으로 부른다는 장전항
뒷산이 바짝 다가왔다.

저산 저땅을 만나보기 위해 수십년을 두고 뭇사람이 한결같이 대화와
교류를 주장해온 것이 아니었던가.

장전항은 항구라기보다 갯가에 전을 벌인 포구같이 조용한 느낌을 주는
시멘트 색조의 단색항이었다.

갑판에서 좀더 자세히 보려고 복도를 지나가는데 어느 방에선가 느닷없이
"어머니"를 길게 부르며 목을 놓고 우는 소리가 새어나왔다.

필경 창밖으로 다가온 장전항을 내다보며 울부짖는 어느 실향민의 통곡일
터라 지나가던 사람들까지 눈시울을 훔쳤다.

10시10분, 이 일이 있게 한 정주영현대명예회장을 선두로 드디어 북한 땅에
첫빨을 내딛기 시작했다.

바로 내 앞에서 아내와 나란히 내린 임동호(62세)씨는 내리자마자 무릎을
꿇고 엎드려 땅바닥에 입을 맞추었다.

장전항에서 한 50리 떨어진 통천 출신인데 52년만에 하는 귀성 인사를 땅에
대한 애정 표시로 요약한 셈이었다.

소감을 물으니 "땅이 따뜻한 느낌이네요" 한다.

고향 땅과 하나가 된 것을 확인하고,이렇게 다시 올 수 있게 해준 데에
대한 감사의 뜻으로 입을 맞췄으니 따뜻한 느낌이야말로 당연한 것이 아닐까
싶었다.

임씨는 누나와 동생이 지금도 고향에 살고 있음을 진작에 알았다면서
"내가 이렇게 가까이 와 있으니 엊저녁 꿈에 내가 보였을 것"이라고 혼잣말
처럼 중얼거리며 손수건을 찾았다.

반별로 구룡연길 만물상길 해금강길로 나뉘어 수십 대의 버스가 금강산을
찾아나섰다.

나는 구룡연으로 가는 버스에 몸을 실었다.

버스는 남녘 사람과 북녘 사람의 거리를 좁히지 못하도록 3m 높이의 철조망
을 좌우로 쳐놓은 신설 포장도로를 따라 온정리로 향했다.

가면서 보니 정장을 한 소년병들이 산기슭이나 논두렁에 말뚝처럼 박혀있는
것이 자주 눈에 띄었다.

철조망만으로는 안심이 안되어 마을 안길 어귀마다 주민 통제용으로 병력을
풀어놓은 것이었다.

온정리의 대표적인 건물주 하나인 "김정숙려관"을 지나니 굵고 곧게 자랐다
하여 미인송으로 부른다는 평균수령 2백년의 소나무숲이 좌우로 펼쳐졌다.

그 가운데로 한국전쟁 때 다 타고 안남은 신계사터를 얼핏 지나 구룡연
주차장에 닿았다.

서울에서 "금강산 영하 20도" 운운했던 말이 무색하게 구름 한점 없는
영상의 푹한 날씨였다.

잔뜩 끼어입은 방한복이 마냥 주체스러울 뿐이었다.

주차장 건너편의 북한 귀빈 전용식당 목란관 앞에 이르니 언제 어떻게 할지
모르게 성이 난 맹수 얼굴의 산줄기가 잘못 건드리면 큰일날 표정으로
하늘을 절반이나 차지하고 있었다.

금강산의 주봉인 비로봉에서 남북으로 흐른 세존봉 채하봉 옥녀봉의
권위주의에 정면으로 부딪친 것이었다.

바위마다 이제부터 우리 일행에 대하여 일일이 검문 검색을 하겠다는 듯한
기세로 보인다.

이를 두고 만년토록 천기를 지켜온 신비의 성곽이라고 하면 너무 토속적인
안목이 될 것이다.

또 크나 작으나 면면이 예술적이라고 하면 조물주가 수수만년동안 풍운조화
를 부려 이룩한 공을 왜곡할 소지가 많으니 감히 품평을 할 수 없는 미적
개념 이상의 그 어떤 것이었다.

그러므로 나이가 됐어도 미처 졸업하지 못한 속물의식 탓에 부질없는 사심
으로 세상을 가볍게 여기고 살아온 허름한 인생은 아예 발도 디밀지 말라는
뜻으로 새기고 같잖은 마음을 여미는 것이 차라리 금강산 출입 면허증을
따는 지름길인지도 모를 일이었다.

금강산의 쪽문격인 금강문은 한 사람씩 나아가 다만 고개를 숙이고 허리를
굽혀야만 통과할 수 있는 비좁은 바위틈새였다.

금강문 옥룡관이라고 새겨놓은 글자 그대로 옥류동을 거쳐 구룡연에 이르는
길이다.

이 구룡연길은 물소리에 마음의 티끌이 말짱 씻기는 듯한 느낌 외에 딴
생각이 끼어들 자리를 주지 않는다.

한편으로는 이미 여기까지 왔으니 반신선은 되지 않았겠느냐는 되다만
자부심에 가슴이 트이기도 한다.

더욱이 바로 눈앞에 옥류동이 펼쳐져 있지 않은가.

옥류동은 수심 5~6m의 비취색이 고여 넘치는 옥류담보다 비스듬히 누운
58m짜리 누운바위와 누가 부르고 누가 재촉하여 그리 급한지 모르게 옥류담
으로 뛰어드는 물살에 사람이 홀리게 한다.

오십 후반의 내 세월이 저렇듯 덧없거니 싶어 넋을 놓다가 불현듯 정신을
가다듬는다.

이태백은 여기도 와보지 않았으면서 도대체 어디를 보고 "이 세상이 아니라"
(별유천지비인간)고 "산중문답"에서 읊었는지 당최 알 수가 없다.

또 김삿갓이 금강산에 와서 "나는 청산으로 가고 있는데, 녹수야 너는
어이 나오고 있느냐"(아향청산거, 녹수이하래)고 탄식한 데가 혹 여기
아닌가 싶다.

여기거나 저기거나 거기가 거기고 보니, 기고 아니고를 따지는 것은 시를
모르는 자의 헛된 수작에 불과할 뿐이라는 자각이 뒤따르기도 한다.

세상에 다시 없을 계곡미에 혹해 시간을 잊고 가다보면 웅장한 물소리와
더불어 구룡연에 이른다.

구룡폭포의 폭음은 금강산의 심장이 뛰는 소리가 아닐까 싶고, 그 물줄기는
금강산에 혈기를 대는 대동맥의 흐름이 아닐까 싶은 것이었다.

얼마를 더 보고 있어도 물리지 않을것 같은 구룡연에서 속절없이 발길을
되돌릴 수밖에 없는 것이 인간사였다.

하산은 이 세상이 아닌 곳에서 다시 이 세상으로 돌아오는 일이었다.

주차장에 이르러 오늘 하루 무엇무엇을 보았던가 하고 스스로 물으니 얼른
이렇다하고 내놓을 것이 없다.

그림 속에 들어가서 놀다가 어느새 그림밖의 여백으로 나온지라 마치 옥의
티처럼 초라할 따름이다.

그리하여 하릴없이 남의 말에 귀를 기울여 본다.

아무리 어렵다 해도 풍악산 개골산 봉래산 하고 이름이 바뀔 때마다 한번씩
최소한 네번은 다녀가야만 어떤 산인지 알터이라 내년 봄에 다시 오기를
다짐하는 이가 가장 많은 것 같았다.

실향민 가운데 또 어떻게 돌아서느냐고, 고향을 두번 등지는 것 같아 차마
오지 못한 이가 많은데 다음에는 꼭 동행하겠다는 이가 그 버금가는 것
같았다.

볼 것은 금강산 바윗덩어리보다 많고 세월은 옥류동의 물살보다 빠른데,
낮이 짧은 계절이라 이맘 때는 "금강산도 식후경"보다 "금강산은 식전경"
으로 부지런해야 하겠다는 반응이 세번째로 많았다.

나는 그동안 남한의 유수한 산들을 들먹이며 이 산은 이렇고 저 산은
저렇고 하여 어느 산이 첫째,어느 산이 둘째 운운했던 불찰을 뉘우치며
없었던 일로 하였다.

금강산을 보기 전에 산을 말했던 것은 금강산에 대한 예의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문구 < 소설가/경기대 교수 >

( 한 국 경 제 신 문 1998년 11월 23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