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 경기가 얼어붙은 덕이라고나 할까.

올해 설 연휴는 다행스럽게도 이렇다할 대형 사건 사고없이 조용히
넘어갔다.

조용하게 넘겼다고는 하나 올해 설연휴는 많은 국민들이 명절분위기는
커녕 답답하고 어두운 마음으로 지냈을 것으로 짐작된다.

언제 끝날지 기약도 없는 경기불황에다 한보사태까지 겹쳐 설날 보너스는
커녕 임금도 제대로 못받은 근로자가 5만명이 넘었다고 하니 올해 설만큼
근로자에게 우울한 명절도 없었을 것이다.

어디 근로자 뿐인가.

기업은 기업대로 노동법개정에 따른 파업의 후유증과 수출부진 환율쇼크
원자재값상승에다 한보사태로 자금시장이 얼어붙으면서 어느 때보다 힘든
설고비를 넘겨야 했다.

때문에 이번 설 연휴는 축제분위기를 빼앗아간 대신 모두에게 우리가
처한 경제현실을 조용히 되짚어 볼수 있는, 흔치 않은 기회가 되었으리라
믿는다.

새삼 거론하기조차 두려울 정도로 우리경제는 지금 어려운 처지에
빠져 있다.

한보쇼크로 중소기업들이 연쇄부도를 맞아 1월중 전국 어음부도율이
지난해 같은달의 두배 가까운 0.21%까지 올라갈 것으로 추정된다.

생산활동은 수십년만에 최악의 상태로 떨어졌고 기업경기 실사지수(BSI)가
10여년만에 가장 낮게 나타날 정도로 체감경기가 극도로 악화되고 있다.

사방을 둘러봐도 어느 한구석 제대로 돌아가는 곳이 없을 정도다.

이런 때일수록 실효성있는 대책으로 국민과 기업을 안심시켜야 할 정부는
한보비리에 휘말려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듯 우왕좌왕하고 있고, 여야
정치권은 국회를 열 생각은 않고 검찰의 눈치만 살피며 장외 공방전만
벌이고 있다.

설 연휴에도 검찰의 수사는 계속됐지만 뭔가 맥을 잡은 듯 하다가도
변죽만 울리고 핵심 근처에서 머뭇거리는 인상이 짙어 의혹만 부풀리고
있다.

정부와 정치권은 물론 국민 모두의 관심이 오직 한보에만 쏠려 있어
나라전체가 "한보열병"에 들뜬 분위기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역설적으로 들리겠지만 모든 국민이 "한보"만 외친다고 한보비리가
속시원하게 규명될수는 없는 일이다.

뜬 소문이나 확대재생산하는 여론재판은 오히려 진실규명에 방해만
될 뿐이다.

한보비리는 이 나라의 모든 정치 경제 사회 주체들이 자신의 위치로
돌아가 본연의 임무에 충실할 때에만 제대로 규명될수 있다고 우리는
생각한다.

한보의혹의 규명은 궁극적으로 검찰이 해야 할 일이지만 국민의
대표기관인 국회가 해야 할 일이기도 하다.

여야는 하루속히 국회를 열고 국정조사를 통해 한보의혹의 실체를
규명해야 한다.

정부와 기업과 근로자들은 언제까지나 한보에만 매달려 있을 것이 아니라
제자리로 돌아가 다시 열심히 일을 해야 한다.

그리하여 비록 올해 설 연휴는 답답한 마음으로 보냈지만 내년 설에는
희망에 찬 덕담을 나눌수 있게 해야 할 것이다.

(한국경제신문 1997년 2월 10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