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동이 불편한 노모를 모시고 모처럼 저녁산책을 나온 길이었을까,
반백이 다된 중년의 아들이 행보가 더딘 어머니를 부축하여 공원산책로를
천천히 걸어가고 있었다.

노인이 힘들어 하면 잠시 쉬었다 또다시 걷곤 하는 광경이 너무 아름다워
노을속에서 한참동안 바라보았다.

자식이 부모를 살해하고 어머니가 사회지도층인 아들을 고발하는
세기말적인 현상이 일어나기도 하지만 아직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는
이처럼 따뜻한 풍경을 만나게 된다.

중년이상이 되면 누구나 그 아들처럼 허물어져가는 어머니에 대한
기억을 갖는다.

그러나 많은 경우 멀리 떨어져 산다거나 바쁘다는 이유로 부모의 존재에
대해 무심하거나 소홀한 것은 아닐까.

폐쇄적인 사회구조와 가부장적인 인습때문에 평생을 가사노동과 가족을
위한 일로 보낸 가여운 우리 어머니들.

아녀자로서 갖춰야할 당연한 덕목으로 인고와 복종, 헌신이 요구된 만큼
그들이 응어리진 한을 달랠 수 있었던 대상은 손끝으로 다독거리는
살림살이와 정성들여 키우는 자식들뿐이었다.

그렇듯 소중한 아들딸을 하나둘 분가시키거나 머나먼 타관으로
출가시키고서도 서운한 마음은 잠시, 돌아서면 자식 걱정에 바람벽에
기대고 선듯 조바심을 내는 것이 어머니의 모습이다.

그러나 무심한 자식들이 제각기 떠나간 허허로운 빈 둥지에 무력한
노인으로 남아있는 부모의 심정을 헤아리는 자식은 과연 얼마나 될까.

문득 시골에 계시는 팔순노모 이야기만 나오면 길을 가다가도 눈시울이
붉어지는 Y교수가 떠오른다.

어려서 품을 떠난 뒤 쉰줄에 접어든 지금까지 부모곁으로 돌아오지
못하는 그를 지금도 어린아들 다독이듯 하는 고향의 어머니는 매사에
차갑고 이성적인 그에게도 공연히 서럽고 그리운 대상인 모양이다.

막다른 골목에서 길잃은 아이처럼 소리내어 울고 싶을 때 언제나
희망처럼 다가오는 어머니.

그것은 영원히 철없는 자식들의 유일한 안식처이자 고독한 삶을 견디게
하는 구원의 힘같은 것인지 모른다.

(한국경제신문 1996년 8월 1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