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방유취"는 세종이 1442년 김예몽 유성원 김문 신석조등 집현전
학자들과 의관들을 동원해 편찬하고 안평대군 김사철 노중예 등이
감수해 3년만인 1445년에 완성시킨 동양최대의 의전이다.

애당초 365권으로 편성된 이 의전은 오랜 정리작업 끝에 성종 8년
(1447)에야 266권 264책으로 간행됐으나 겨우 30질만을 찍어 내의권
전의감 혜민서 등 의료기관에 배포했다.

내용은 의료기술 의료행위 복약방법 약품분류등을 개괄적으로 서술한
총론에 이어 질병을 91개부분으로 나누고 출전에 따라 연대순으로 의방을
정리했는데 당 송 원 명시대를 망라한 153종의 방대한 의학서들이 인용돼
있다.

그러나 이 의전은 안타깝게도 지금 우리나라에는 초간본(을해자본)이
한질도 전해지지 않고 있다.

엉뚱하게도 일본의 황실도서관인 궁내성 서능부에 264책중 252책이
소장돼 있을 뿐이다.

임진왜란때 왜장의 한 사람이었던 우희다수가가 풍신수길에게 조선출전
신고를 하러갔다.

그자리에는 풍신수길의 시의였던 정림이 백석해 있었는데 고는 우희다수가
에게 특별히 가선선물로 조선의서를 부탁했다는 일본측 기록이 있다.

그뒤 조선에서 돌아온 우희다수가는 정림에게 수십궤나 되는 조선의서들을
주었고 그는 이 책을 기본으로 "양안원문고"를 설치했다.

정림은 조선에서 이주해간 사람으로 그가 저술한 의서는 일본에서
가장 널리 읽혔다는 기록도 여러가지를 생각케 해주는 대목이다.

약탈해간 "의방유취"는 그 책이 완성된지 거의 4000여년이 지난 1852년
강호에서 희다촌직관이란 의관에 의해 목활자로 중간된다.

그뒤 강화도조약이 강행될때 일본은 266권의 "의방유취"중간본 2질을
우리정부에 수호예물로 주었다.

빼앗긴 초간본 대신 중간본을 예물이랍시고 받았으니 통탄할 노릇이었지만
당시 우리정부는 이런 문제를 거론할 여유조차 없었다.

이때 받은 2질의 일본중간본 "의방유취"는 지금 서울대 규장각과 연세대
도선관에 각각 소장돼 있다.

문화재위원회는 19일 국내에서 처음 발견된 유일한 을해자 초판본
1백(201권)을 보물 제1234호로 지정했다.

다행스러운 일이기는 해도 전266권 가운데 단 1권을 보물로 지정해
놓고 "한국의학사와 인쇄문화사연구에 귀중한 자료"라고 하기조차
민망스럽기 짝이 없다.

"의방유취"야 말로 정부가 떳떳하게 일본에서 돌려 받을 수 있는
약탈문화재가 아닐까.

(한국경제신문 1996년 1월 21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