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재석 칼럼] 신뢰를 돈으로 메우는 사회
모든 구기 종목의 바탕엔 속임수가 깔려 있다. 슛하는 척 패스하거나, 토스하는 척 네트 위로 공을 넘긴다. 능수능란한 속임수엔 질책 대신 ‘천부적 재능’이라는 찬사가 붙는다. 야구도 마찬가지다. 변화구는 그런 속임수의 정점이다. 최대한 직구처럼 던질수록 높은 구종 가치를 인정받는다. 경기를 교란하는 속임수도 있다. 볼을 스트라이크처럼 보이게 만드는 포구 기술 ‘프레이밍’이 대표적. 포수의 몸값을 높이는 주요 잣대이자 심판의 판별 능력을 재는 척도다. 속이려는 자와 속지 않으려는 자의 대결, 스포츠의 긴장감이 잉태되는 순간이다.

올해 한국 프로야구는 ‘자동 투구 판정 시스템’을 도입했다. 야구를 하는 나라 중 처음이다. 심판의 오심을 원천 봉쇄하겠다는 취지. 억울한 일은 줄었지만, 그만큼 경기는 밍밍해졌다. 심판의 스트라이크 판정에 씩씩거리는 선수가 없어졌고, 배를 내밀고 침을 튀기며 항의하는 감독도 사라졌다. 세계 최초로 이런 시스템을 도입할 만큼 한국 야구의 심판 신뢰도가 세계 최저였던 걸까.

선거관리위원회는 지난 총선에서 수검표 제도를 부활시켰다. 30년 만이다. 인공지능 시대에 일일이 손으로 표를 세다니. 부활이라기보다 퇴행에 가깝다. 투표함에 설치한 방범 카메라도 시·도 선관위 청사의 대형 모니터를 통해 24시간 공개했다. 야구판이든 선거판이든 시스템 개선에 나선 배경은 동일하다. 심판의 판단을 못 믿겠다는 것. 신뢰의 부재는 이렇게 추가적인 비용을 요구한다.

그래도 이 정도면 애교다. 나라 경제 전반에 영향을 미치는 안건일 경우엔 문제가 심각하다. 지난 21대 국회 문턱을 넘지 못한 ‘금융투자소득세 폐지’ 안건이 여기에 속한다. 금투세는 주식 등으로 번 돈에 세금을 매기겠다는 제도다. 당초 2023년 시행 예정이었는데 여야 합의로 2년 유예됐다. 주식시장 침체 등 부작용이 크다는 이유로 여당이 폐지를 주장했지만, ‘부자 감세’라는 야당의 구호 한방에 나동그라졌다. 정부의 설명은 못 믿겠다는 여론이 야당의 믿는 구석이다. 기업투자 활성화 대책도 늘상 입법에 난항을 겪는다. 국가 경제에 도움이 된다는 논리는 ‘재벌 특혜’라는 감성적 용어에 매번 무기력하다. 신뢰라는 사회적 자본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영국 싱크탱크 레가툼연구소가 발표한 ‘2023 국가별 번영지수’에 따르면 한국의 사회적 자본 지수는 세계 107위로 하위권이다. 특히 사법시스템(155위) 정치인(114위) 정부(111위) 등 공적 기관에 대한 신뢰도가 낮다. 자본이 모자라면 성장을 못 하듯 불신이 팽배한 사회는 경제 발전에 어려움을 겪는다. “조건이 동일한 상태에서 국가신뢰지수가 10% 높아지면 경제 성장률이 0.8%포인트 상승한다”(세계은행)는 연구 결과도 있다.

정치인이나 관료의 스캔들은 그래서 치명적이다. 국회의원이 새마을금고에서 불법대출을 받거나, 정부 고위직이 이권에 개입했다는 사실이 드러날 경우 사회 전체의 손실은 표면적인 착복 액수에 그치지 않는다. “다 도둑놈들이야!” 이런 인식이 확산하면 그 어떤 정책이나 입법도 목적을 달성하기 어려워진다.

더 큰 문제는 그다음 수순. 불신은 곧잘 증오로 이어진다. 믿지 못하는 대상은 미워지기 마련이다. 사회적 대립을 부추기고 이성적인 접근을 차단한다. 정치는 ‘필연적인 불일치’를 해소하는 과정이고, 신뢰는 이 과정을 매끄럽게 만드는 윤활유다. 부족하면 정치는 결국 오작동하고, 그 사회는 위기라는 파도를 넘지 못한다. 신뢰라는 자본을 탕진하는 이들이 우리 사회의 적인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