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이 일어난지 열흘만인 1592년4월22일 의령에서 곽재우
(1552~1617)가 최초로 의병을 일으켰다.

전라도방면으로 진출하기 위해 낙동강과 남강의 합류지점인 정암나루에
몰려든 왜군을 그는 독자적인 게릴라 전법으로 격퇴했다.

이것이 한국전사에서도 유명한 "정암전투"다.

그는 왜군선발대가 꽂아놓은 표지판을 이리저리 옮겨놓아 적지를
습지로 유인한뒤 매복병을 통해 공격했다.

때로는 지형지물을 잘 이용해 여기저기서 피리를 불게해 적을 교란시켰고
자기와 똑같이 붉은 옷과 백마를 태운 군졸을 여러명 풀어놓아 적들의
혼을 빼놓은뒤 복병들이 공격하게 만드는 전략도 썼다.

스스로 "허허실실의 전법"이라고 표현한 이런 게릴라작전을 써서
상승불패의 기록을 세웠다.

그야말로 신출귀몰했던 그를 사람들은 "천강홍의장군"이라고 불렀다.

단제 신채호도 우리나라 역대 명장중에서 해군에서는 이순신,
육군에서는 곽재우는 경상우도 유학의 종장으로 퇴계 이황과 쌍벽을
이루고 있던 남명 조식의 문인이자 그의 외손녀 사위였다.

34세때 문과정시에 차석으로 급제했으나 국왕의 뜻을 거슬리는 내용을
썼다하여 급제가 취소되는 일을 겪은뒤 부터 그는 평생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은둔했던 스승처럼 살려했다.

그러나 임란때의 전공으로 뜻하지않게 당상관이 되어 성주.진주목사를
지냈으며 정유재란때는 경상우도방어사로서 대왕산성수비의 책임도
맡았다.

또 경상좌병사때는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갔다가 그죄로 영광에서
3년동안 유배생활도 했다.

그뒤부터 그는 임금이 여러차례 벼슬을 내렸어도 출사하지 않고
고향인 의령의 영산남쪽 낙동강가에 초당을 지어 망우정이라하고
솔잎으로 끼니를 이으며 선술을 닦다가 일생을 마쳤다.

12월은 "곽재우의 달"이다.

그의 고향인 의령을 비롯한 경남일대와 서울에서는 그를 기리는 갖가지
기념행사가 열리고 있다.

의령에는 그를 기리는 충익사 탑이 높이 세워져 있고 그가 쓰던 장검
말안장 벼루 등의 유물도 그대로 보존돼 있다.

대구 수동에도 말을 탄 그의 동상이 우뚝 서있다.

예부터 의령이나 합천은 "한마당"이나 다름없다고 했다.

은둔적 학풍을 지녔으면서도 국가의 위기앞에 투철한 선비정신을
보였던 한 선비와 전직대통령이었던 또 한사람의 경우가 너무 대조적이다.

"의롭지않게 부와 귀를 누리는 것은 뜬구름같다"는 공자의 말이
요즘처럼 새롭게 들리는 때도 없다.

(한국경제신문 1995년 12월 4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