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련은 희봉이 보채의 어머니 설씨와 친하다는 것을 아는지라 보옥이
보채를 좋아했으면 하는 희봉의 말에 대해서는 대꾸를 하지 않았다.

"아 참, 내 정신좀 봐라. 서방님이, 아니 국구전하가 오신다는 말을
듣고 온 정성을 다해서 주안상을 차려놓았는데, 주안상 들이는 것으로
깜박 잊고 있었네. 얘, 평아야. 거기 주안상 차려놓은 거 지금 들이어라"

"네. 마님"

평아를 비롯한 시녀들이 진수성찬으로 차려진 주안상을 들고 방으로
들어왔다. 여행길에 제대로 음식을 먹지 못했던 가련은 희봉에게도 술을
따라주며 자기가 없는 동안 집안 살림을 맡아 다스리느라고 고생을 많이
했을 거라면서 위로해 주었다.

"고생은 무슨 고생요. 오히려 집안 일들만 엉망으로 만들어 놓았죠."

희봉이 녕국부 살림까지 맡았던 일들을 이야기하며 짐짓 겸손을 부렸다.
그런 이야기들을 나누고 있는데, 방문 밖에서 두런거리는 소리가 났다.
희봉이 바깥을 향해 말했다.

"거, 누구냐?"

"평아인데요. 방금 설씨댁 마님께서 향릉을 보내 저한테 가련 대감님이
잘 돌아오셨는가 물어 보는군요. 그래 대답을 해주고 보냈어요."

아까 가련이 설씨댁에 인사를 갔을때 설씨는 어디로 나들이를 갔는지
보이지 않고 그 대신 처음 어떤 어여쁜 여자가 가련을 맞이해 주었다.

"아, 그 여자가 향릉인 모양이군"

가련이 무슨 생각에 잠겨 중얼거렸다.

"왜요? 향릉에게 마음이 있어요? 양주, 소주, 항주 다니시면서 여러 예쁜
여자들 눈요기 실컷 하셨을텐데, 그 여자들보다 향릉이 더 예쁜 모양이죠?"

"아니, 그런게 아니고. 아까운 생각이 들어서 말이야"

"점점 더 태산이군요. 아까운 생각이라니. 향릉이 국구 전하의 첩이 되지
않고 설반의 첩이 된 것이 아깝다는 말인가요?"

"어떻게 말을 그렇게 해요? 설반이라는 인물을 내가 잘 아니까 하는
말이지"

가련이 정색을 하고 나무라자 희봉이 주춤해졌다.

"하긴 나도 그런 생각이 들어요. 향릉이 포주같은 놈에게 끌려다니다가
다시 설반에게 팔린 몸이긴 하지만, 그 성품은 어느 귀한 집 규수 못지
않거든요. 개차반 같은 설반과는 비교가 안되죠. 설반은 그 주제에 향릉을
첩으로 얻은지 몇 달도 안되어 벌써 싫증이 났는지 다른 계집들이랑
놀아나고 있거든요"

(한국경제신문 1995년 10월 1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