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씨가 겨울문턱에 들어섰다.

벌써부터 설원의 낭만을 즐기려는 스키어들의 마음은 조급하기만 하다.

한국스키장사업협회가 집계한 지난해 전국 9개스키장의 내장객은 연인원
160만명.

각 기업체의 스키레저타운건설붐으로 오는 2000년까지 스키장수도 20개가
넘을 전망이다.

그만큼 한국스키가 대중화의 일로에 놓여 있다는 얘기다.

한국근대스키60년사를 함께 해온 스키계 원로 백남홍옹(81)에게는 오늘날
스키의 발전이 격세지감으로 다가온다.

지난 87년까지 30년동안 대한스키협회 전무이사 부회장등을 지낸 백남홍옹
은 스키계의 대원로다.

영동산간지방에 때이른 대설소식이 전해지던날 서울 연희동에 있는 백옹의
자택을 방문했다.

-날씨가 쌀쌀해졌습니다. 팔순이 넘으셨는데 이번 겨울에도 스키를
타시겠네요.

<>스키대회가 있을때마다 원로라고 초청을 해줍니다. 초청에 다 응하기는
체력적으로 힘들고 해서 한시즌에 7~8번정도 스키장에 가서 스키도 타고
대회시상도 하고 그러지요.

물론 스키는 나이도 있고 해서 가볍게 탑니다.

-요즘은 겨울만 되면 스키장이 북적댑니다. 옛날에는 어땠습니까.

<>60년전의 일을 회상해 본다면 1930년대에 스키타는 사람들은 총독부산하
에서 산림감시원으로 일하던 일본인이 대부분이었지요.

우리나라사람들은 일본유학생이나 산악운동을 하는 사람들이 더러 스키를
탔습니다.

이들 모두를 합쳐도 당시 스키인구는 얼추 1백여명 정도였습니다.

-그때 스키장은 몇군데나 있었습니까.

<>원산 신풍리스키장 영변동령굴약식스키장 함경남도삼방협스키장등이
있었고 남쪽에는 밀양표충사가 있는 삼랑진의 말방목초지가 자연설스키장
으로 이용됐습니다.

물론 스키장에 리프트도 없고 해서 지그재그로 걸어 올라갔지요. 특이한
것은 당시 서울에서 스키열차가 운행됐다는 사실입니다.

경원선열차 4~5량 가운데 1량정도를 스키열차로 운행해 원산에 도착하기전
삼방협스키장에 정차했죠.

-우리나라 근대스키의 시작은 어떻게 이뤄졌습니까.

<>1904년께 일본보다 1년 빠르게 교역차 우리나라에 온 핀란드인들이
원산신풍리 뒷산에서 처음으로 스키를 탔다는 얘기가 있습니다.

그후 일본인중심으로 1930년 원산에서 제1회스키대회가 열려 해방전까지
계속됐습니다.

-우리나라사람들이 스키를 타기 시작한 것은 언제부터였는지요.

<>1925년께 백령회라는 우리나라사람들의 산악스키모임이 있었습니다.
경포에서 무연탄공장을 경영하던 엄흥섭씨가 사재를 털어 회원이던 김정태
박순만 주형렬씨를 일본으로 한달간 스키연수를 보냈죠.

이것이 최초의 스키훈련이기도 했습니다.

-스키는 어떻게 시작하시게 됐습니까.

<>저는 젊었을때 고향 신의주에서 일가형님께서 경영하던 안경 귀금속점
에서 10여년 일했습니다.

제가 22세 되던 해에 폐결핵에 걸려 공기 좋은 곳으로 요양할 곳을
찾았지요.

평안도와 함경도 산간을 찾다가 금강산어귀에 위치한 삼방협약수를
찾았습니다.

그곳 사람들이 이곳은 여름철약수가 좋고 겨울에 눈이 많이 쌓여 스키를
타면 건강이 좋아질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해 가을까지 약수를 마시고 겨울에는 스키를 타고 하니 병도 완쾌돼
재발하지 않았습니다.

그후 삼방협스키장에서 매년 스키를 즐겼지요. 스키가 저에게는 폐결핵
치료약이었던 셈입니다.

저로서는 큰 자랑이고 모든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은 일입니다.

-해방후 대한스키협회발족 당시를 말씀해 주십시오.

<>해방이듬해 4월에 백령회소속이었던 김정태씨가 주축이 되어서 대한스키
협회를 만들었습니다.

일본스키연수를 받고 1급지도자자격증을 획득한 김정태씨와 김용구 주형렬
박순만씨등이 권영대이사장과 함께 집행부를 구성, 서울대문리대강의실에서
창립총회를 가졌습니다.

-스키경기에도 출전하신 적이 있었겠네요.

<>대한스키협회창립 이듬해인 1947년2월 지리산 노고단에서 선수 70여명이
참가한 가운데 제1회 전국 스키선수권대회겸 전국체전스키경기가 개최
됐습니다.

그때 제가 임원겸 선수로 출전했지요. 성적은 25위였습니다. 그 대회가
저의 처음이자 마지막 공식대회출전이 됐습니다.

-당시 스키경기는 어떻게 치렀습니까. 스키대회를 치를만한 경기장이
없어서 애를 많이 먹었다고 하던데요.

<>지리산 노고단대회 다음해인 48년1월에는 서울에 18년만의 대설이
내렸습니다.

약30cm 정도 내려 지금 워커힐호텔이 있는 아차산에서 스키강습과 제2회
스키대회가 열렸지요.

그 다음해에는 울릉도가 눈이 많이 내린다고 해서 선수 70여명이 그곳까지
배를 타고가 제3회 스키대회를 열었습니다.

당시 저는 가지 않았습니다만 울릉도는 밤사이 1~2m의 큰눈이 내리지만
바람과 지열때문에 그 다음날 점심때만 되면 금방 녹아버려 대회를 치르는데
어려움을 겪었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김정태씨와 정규홍씨, 그리고 저까지 세사람이 태백산맥일대에
스키장으로 마땅한 곳을 찾아 나섰습니다.

-어려움도 많으셨겠습니다.

<>당시에는 깊은산이나 오지에는 공비출몰의 위험이 있다고해서 미군정
당국의 증명을 얻어야 통행이 가능했습니다.

저와함께 스키장을 찾아나선 김정태씨나 정규홍씨 모두 산악인이라서
산악스키를 타며 며칠밤을 산속에서 헤매는일을 거뜬히 해냈지요.

마침 현재 용평스키장 진입로근처에 있는 대관령 지루메산을 찾았습니다.
당시에는 화전민의 초가 몇채만 있는 심산이었지요.

마을아낙들의 구슬픈 정선아리랑노래도 인상적이었습니다. 우리 셋은
대관령 성황당 전나무골 새봉령(해발 1,031m)에 올라 지형을 살피고 횡계리
까지 약8km의 신나는 활강을 했었습니다.

이 코스는 그후 60년께까지 18km 장거리경주코스로 이용됐습니다.

-그래서 대관령스키장이 생겼군요. 그럼 한국전쟁 당시에도 그곳에서
대회를 치렀습니까.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징병대상연령에 있던 스키선수들은 김정태씨의
섭외로 군의 협조를 얻어 군정훈감실에 대거 입대했습니다.

원래 목표는 통일이 되면 백두산에 태극기를 꽂을 스키부대를 만든다는
것이었습니다.

전쟁발발이후 거의 모든 스키인이 부산으로 피란갔지요. 부산에는 당시
스키협회장이었던 신업재씨가 있어서 스키인들이 모두 부산에 집결해
태백산 상동광산에서 대회를 치렀습니다.

당시 상동광산의 한 임원이 숙소와 침식은 회사사택을 쓰게 하고 회사트럭
으로 슬로프의 눈고르기작업을 할수 있게 배려해서 전쟁중에도 스키대회를
치를수 있었습니다.

-대한스키협회임원을 오랫동안 맡으셨지요.

<>한국전쟁 발발직전 부산에서 의원을 경영하던 의사 신업재회장이 취임
하면서 이사장(전무)직을 맡아 신회장과 함께 16년동안 임기를 같이
했습니다.

회장단이 바뀌면서 이사 감사 부회장등 30년가까이 협회일을 했지요.
협회일을 보면서 1960년 대한체육회사무총장으로 부임한 김용모씨가 스키
발전에 많은 조언을 해주셨습니다.

그당시 스키대회에 대한체육회보조금 5만원을 가지고 대관령스키장에
찾아온 김용모씨는 알파인과 노르딕을 분리해서 경기임원도 늘리고 선수도
별도로 육성해야 한다는 조언을 했지요.

그래서 그이듬해 대회때는 알파인과 노르딕을 분리했습니다. 경기임원이
모자라 취재기자들까지 심판을 보고 기록인 역할까지 했던 경우도 있었지요.

이후 선수들의 경기력이 비약적으로 향상되어 오늘날 세계중위권, 아시아
에서는 일본 다음수준까지 올랐습니다.

-스키대회 초창기당시 스키장비는 어땠습니까.

<>창피한 이야기입니다만 해방후 일본사람들이 스키장비를 남겨놓고 간것이
시중에 주로 나왔습니다.

거의 모두 중고품으로 고물상같은데서 구할수 있었지요. 운동구점에
신품이 간혹 나왔지만 극히 소수였습니다.

부츠도 군화를 그대로 썼지요. 대관령스키장인근 부락사람들은 나무를
잘라 휘지않게 쪄서 수제스키를 만들어 쓰기도 했습니다.

당시 고물상에서 중고스키 군화 바인딩 폴을 포함해서 1백50원정도에
살수 있었습니다.

지금의 과장직급 월급이 당시 40원정도였으니 매우 비싼편이었지요.

-손기정옹과는 막역한 사이라면서요.

<>신의주에서 같이 자랐습니다. 신의주소학교시절을 같이 지냈죠. 소학교
졸업이후 손기정씨는 마라톤으로 저와는 길을 달리했습니다.

1936년 손기정씨가 베를린올림픽마라톤을 제패한 이듬해 삼방협스키장에
나타났습니다.

그때 저는 폐결핵이 완치됐을 즈음이었습니다. 그때 고향친구인 손기정씨를
만나니 무척 반갑더군요.

그후 손기정씨는 저와 스키관계자들을 만나면 자신은 육상인이자 스키인
이라면서 스키에 대한 나름대로의 애착을 가집디다.

요즘 스키대회때 초청하면 꼭 참석해서 스키선수들을 격려해 줍니다.

-안경업계에서도 대원로로 알려져 있는 것으로 압니다.

<>신의주에서 일가형님께 안경판매업을 배운뒤 남하한 다음에도 안경
소매업을 했습니다.

60세때까지 자영업을 하고 은퇴했는데 안경판매주식회사 사장직등 지난해
까지 안경관계 일을 했습니다.

스키를 빼고 말하자면 안경업은 제 생업이었지요. 자연속에서 하얀 눈가루
를 휘날리며 달리는 스키의 매력은 환상적입니다.

-오랜시간 감사합니다.

< 대담 = 김흥수 체육부장 >

(한국경제신문 1994년 11월 20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