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말 우왕14년(1388년)조정은 명나라 요동을 공략하기 위하여 자칭
10만대군을 출정시켰다.

출정군의 편성은 팔도도총사에 최영 화군도통사 조민수 우군도통사
이성계등이었다.

원래 이성계는 사부가론을 들어 요동정벌을 반대하였으나 우왕과
문하시중 최영등의 강력한 주장으로 실행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성계와 조민수가 이끄는 좌.우군은 5월에 압록강하류의 위화도에
이르렀으나 때마침 큰비가 내려 압록강을 건너기 어렵게 되어 요동정벌
의 포기를 우왕에게 건의하였다.

그러나 우왕과 최영이 요동정벌을 계속 독촉하여 이성계는 조민수와
상의한뒤 회군을 단행하고 말았다.

이것이 역사상 유명한 "위화도화군"이다.

개경에 돌아온 이성계는 최영의 군대와 일전을 벌인 끝에 최영을
고봉현으로 유배보내고 우왕을 폐위하여 강화도로 방출하는등 정치적
실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이성계는 이후 이를 바탕으로 전제개혁을 단행하는등 조선건국의 기초를
다진 것으로 평가되고 있으나 화군 당시부터 역성혁명의 의지가 있었는지
여부는 분명하지가 않다.

이성계는 1389년 11월에 창왕을 또 폐하고 정창군 요를 세웠으며 91년
1월에는 삼군도총제사가 되었고 92년7월 배극염등의 추대로 왕위에
오르게 되었다.

"위화도회군"에서 4년여만에 역성혁명을 이룬 셈이다.

역사에 가정은 없다지만 만일에 조선왕조가 성립되지 않았다면 "위화도
회군"이란 현대형사법상 "군형법상의 군사반란죄"였을까 아니면 "내란죄"
였을까.

상황은 다르지만 1979년에 "12.12사태"가 발생하였다.

이해 일어나 10월26일 박정희대통령 시해사건이 일어나자 당지 전두환
합수본부장을 중심으로 한 신군부세력은 "10.26사건"관련 혐의를 수사
한다는 "명목"으로 정승화 당시 계엄사령관겸 육군참모총장을 강재
연행한 사건이었다.

검찰은 12.12사건을 수사한 결과 "군사반란사건"으로 규정하면서 "12.12
를 일으킬 때부터 정권 탈취의 목적이 있었다고 볼 증거가 없어 내란죄를
인정하지 않았다"고 설명하였다.

검찰의 입장은 이해할만 하다.

"정권 탈취의 목적이었는지"여부를 가려낼 증가를 찾는다는 것이 여간
어려운 일이아니고 또 12.12사태를 "군사반란사건"으로 규정짓는 것도
하나의 진전이라면 진전이라 할수 있을 것이다.

다만 12.12사태후 80년의 "5.17"비상계엄 전국확대 "5.20"임시국회 봉쇄,
그리고 8월27일의 제11대 대통령 선출및 81년 3월의 대통령 취임등 일련의
"정치진전"을 어떻게 평가해야 할지 모르겠다.

역시 역사의 심판에 맡길수 밖에 없는 일일까.

(한국경제신문 1994년 11월 1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