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의 집필실은 아담했다. 컴퓨터와 스탠드 갓등이 놓인 책상,1인용 앉은뱅이 책상,방 한 쪽을 가득 메운 책꽂이….바닥에도 책들이 쌓여 있다. 문 옆 벽에는 초상화가 한 점.지난해 말 김흥수 화백이 그려준 것이라고 했다. 그런데 표정이나 느낌이 사뭇 다르다. 단아하고 곱상한 여성 작가의 이미지가 아니라 석고 데생 같은 분위기다. '천의 얼굴'을 가진 그의 내면을 노(老)화가는 꿰뚫고 있었던 것일까.

늦깎이 작가로 서른일곱 살에 등단해 국내 최고 권위의 이상문학상과 동인문학상을 석권한 소설가 권지예 씨(51).그는 엉뚱하게도 "어릴 때 꿈은 코미디언이었다"고 말했다. 이화여대에서 영문학을 전공하고 프랑스 파리7대학에서 '한국 근대문학에 나타난 여주인공들의 섹슈얼리티를 통한 여성성'을 주제로 박사학위를 받은 그가 코미디언을 꿈꾸었다니.

"초등학교 6학년 무렵에 코미디 프로를 많이 봤는데 여자가 드물었어요. 제 생각에 여자 코미디언 중 우뚝 설 것 같더라고요. 제가 모창을 잘했거든요. 그래서 까불까불했죠.평소엔 얌전한 스타일이라 선생님들이 모범생이라고 여겼겠지만 어느 날 끼를 발휘했죠.수업 끝날 때쯤 즉석 춘향전을 했는데 키가 작아서 맨 앞에 앉아 있던 제게 이방 역을 하라는 거예요. 대사가 한두 마디밖에 없는 이방이지만 '아이고~ 사또~' 하고 흉내를 내니까 애들이 뒤집어졌어요. 그 덕분에 학예회 총감독이 됐죠.좀 엉뚱한 데가 있긴 했나봐요. "

문학에 눈을 뜬 것은 여고 때였다고 했다. 멋모르고 나간 백일장에서 장원에 뽑힌 데다 숙명여고 학보 '숙란'에 20 대 1의 경쟁을 뚫고 합격한 뒤 문학적 재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그때 신문반이 유명했어요. 배지를 달면 어떤 남학교도 출입할 수 있다고 해서 시험을 봤죠.지원 동기가 '금남의 벽을 뚫고 싶어서'라고 했더니 뽑아주더군요. 그 시절 당돌하게도 '교복 · 두발 자유화' 이런 기획기사를 썼어요. 발로 뛰며 취재를 했는데 글을 잘 쓰려면 책을 많이 읽어야겠구나 처음 깨달았죠.그때부터 본격 문학소녀로 책벌레가 됐어요. 작가 치고 어릴 때 책 많이 안 읽은 사람은 저뿐일 걸요. "

맏딸로 자라서 그랬을까. 겉으로는 얌전해 보여도 그는 늘 생각이 많았다고 했다. 초등학교 3학년 때 불면증을 앓기도 했다.

"각자 방이 있는 것도 아니고 컴퓨터가 있는 것도 아니어서 불을 끄면 자야 하는데 잠이 안 오는 거예요. 그때 개발한 게 영화를 찍는 것이었어요. 눈 감고 머리로 영화를 찍었죠.주연을 신성일로 하다가 나중에는 재미가 없어서 제가 각본을 썼어요. 상상이었는데도 조숙했는지 키스신만 갖고 이틀 밤 가고….나중엔 드라마 본 것과 뒤섞여서 일제시대도 등장하고 웃기지도 않았죠.처음엔 잠을 자기 위해서 그랬는데 나중엔 너무 재미있어서 눈에 침 묻혀가며 머릿속에 영상을 떠올리고….지금 생각해 보니까,제 소설에 영상적인 이미지가 많다는데 그게 거기서 비롯된 게 아닌가 싶어요. 학교 가다가도 영화 간판이나 포스터 보고 꽂히면 그 앞에 앉아 상상하다 수업시간에 늦어서 혼도 나고,좀 독특했죠."

대학 시절에는 거의 수업을 듣지 않고 연극에 빠졌다. 주연도 맡았다. 히스테릭한 역을 했는데 분장을 지우고 나니 사람들이 못 알아볼 정도로 연기에 몰입했다. 그때 연출가가 '천의 얼굴'이라며 배우를 권했다. 연기파 배우로 나가볼까 하는 유혹도 느꼈지만 결국 문학의 길로 돌아왔다.

대학 3학년 때 문학청년들이 만든 '다락방' 동인으로 활동하고 4학년 때 학보사 현상문예에 당선하면서 그는 습작에 매진했다. 졸업 후 첫 직장은 민음사였다. 그때 이문열 박완서 등 유명 작가들을 거의 다 봤다. 다음 해부터 중학교 교사로 8년간 일하다 프랑스로 건너갔다.

"남편(미술평론가 겸 시인 김종근 씨)이 해외 출장을 몇 번 갔다 오더니 파리에 확 빠져서 거기로 유학을 가자고 했죠.한 3년 각오하고 박사학위 받아 오자면서 자꾸 꼬드겼어요. 그래서 애를 갖고 육아휴직을 신청해서 떠났는데 유산했어요. 1년 후에 출생증명서를 보내라기에 없다고 했더니 당장 복직하든지 퇴직하라고 해서 복직했지요. 그런데 프랑스가 눈에 자꾸 밟혀 사표를 내고 1993년에 다시 갔습니다. 거기서 애 낳고 육아지원금을 받으면서 소설을 쓰기 시작했죠.그렇게 지내다 학비가 공짠데 내가 왜 이러고 있나 해서 학교에 들어갔고."

1997년 단편 '꿈꾸는 마리오네뜨'로 문예지 '라 쁠륨'의 신인상을 받으며 등단했다.

"원래 제목은 '이중주'였어요. 은희경 씨의 1995년 등단작이 '이중주'라고 해서 제목을 그걸로 바꿨는데 한동안 연락이 없더군요. 친정에 전화해서 권지예 씨를 찾으니까 엄마가 '그런 사람 없습니다' 하고 끊어버렸다고 해요. 필명이니까 엄마도 몰랐죠."

그러나 등단했다고 다 되는 게 아니었다. 어디서도 원고 청탁이 오지 않았다.

"작가가 된 건 감격스러웠지만 참 고독했어요. 어느 날 창비 단행본팀에서 연락이 왔는데 '언제 좋은 작품 완성되면 달라'고 해요. 제가 너무 고지식해서 논문을 써야 한다고 곧이곧대로 이야기하고 끊으니까 남편이 '쓰고 있는 게 있는데…'라고 말하면 어떠냐고 해서 그렇게 했죠.그랬더니 계간 창비에 중편을 끼워넣어줬어요. 창비는 신인을 키우는 시스템이 돼 있었던 건지 논문을 쓴다니까 문학전집도 DHL로 보내주고,너무나 고마웠죠."

학위를 따고 귀국하자마자 교통사고를 당해 5개월간 병실에서 지냈다. 당시 쓴 작품들도 게재할 곳이 없어 애를 먹었다. '뱀장어 스튜'를 문학사상에 보냈다가 퇴짜맞았다. 우여곡절 끝에 현대문학과 인연이 닿았다.

"양숙진 현대문학 주간이 전화해서는 '이렇게 독특한 작품은 처음 봤다'며 7월호에 싣겠다고 하더군요. 얼마 뒤 문학사상에서 전화가 왔어요. 김윤식 선생이 월평을 쓰는데 자료가 너무 없으니 사진을 보내라고 해서 보냈죠.그런데 이례적으로 7페이지나 나왔어요. 얼마 뒤 이 작품으로 이상문학상을 받았으니 참 신기하죠.1년 반 전에 거절한 문학사상에서 주관하는 이상문학상을 받았으니…."

2002년 이상문학상에 이어 그는 2005년 동인문학상까지 거머쥐었다. 소설가라면 누구나 탐내는 문학상을 두 개나 받고 대학교수로 임용된 뒤에도 그의 억척 근성은 쉬지 않고 에너지를 뿜어냈다. 이번 주에 출간한 네 번째 장편소설 '유혹'에서는 '한국문학에 존재하지 않았던 새로운 캐릭터'로 평가받는 주인공을 내세워 문단을 놀라게 했다. 도발적인 30대 이혼녀 유미가 욕망의 정글에서 펼치는 서바이벌 게임을 다룬 것.

"야한 장면이 많이 나오는데 다들 어떻게 그렇게 묘사할 줄 아느냐고 물어요. 어디 꼭 살인을 해봐야 스릴러를 쓰나요. 아들놈 몰래 야동 다운받아서 눈치보며 연구하고,남들 얘기도 듣고 영화도 보고 그렇게 배우면서 상상력을 극대화하는 거죠.평론하는 원로 선생님 한 분이 저녁 먹는 자리에서 '나한테 유미 좀 소개시켜줘'라고 해서 막 웃었죠.소개시켜 드리긴 그렇고 선생님을 작품 속에 넣어드리겠다고 했어요. "

그의 끼를 닮았는지 딸(김하연 · 23)은 외국어에 뛰어나고 아들(김윤호 · 17)은 사진작가 지망생이다. "아들을 대학에 보내고 나면 무라카미 하루키처럼 1년에 6개월은 제가 좋아하는 나라에 가서 생활하며 글을 쓰는 게 꿈이에요. 진짜 자유롭게 말이죠."

만난사람 = 고두현 문화부장 kd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