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탠퍼드대 부교수 "수준 높은 한국학 연구자 키우려면 조기 한국어 교육 필요"
美 비영리단체 운영 '코리안랭기지 빌리지' 있지만 한국 정부·기업 지원 부실
[특파원 시선] K-팝·K-드라마의 다음 챕터
"1984년에 내가 푹 빠졌던 오리지널 '가라데 키드' 영화가 있었습니다.

정신적·신체적 단련을 통해 내적·외적 악마와 대적하는 법을 배우는 소년에 관한 영화입니다.

그리고 나는 스무 살이 되던 해 서울에서 나의 내적·외적 악마와 싸우기로 했습니다.

"
미국 스탠퍼드대학의 대프나 주어 동아시아 언어·문화학과 부교수는 20일(현지시간) 미 캘리포니아의 이 학교 벡텔 콘퍼런스센터에서 열린 '한국학 콘퍼런스'의 한 토론 세션에 참석해 이렇게 자신을 소개했다.

주어 부교수는 이 학교에서 K-팝과 한국의 문학, 영화, 대중문화 등을 가르치는 지한파다.

실제 한국으로 건너와 태권도장을 다니며 '검은띠'를 땄고, 한국인 남편과 결혼도 했다.

주다희라는 한국어 이름까지 갖고 있다.

스탠퍼드대학 월터 쇼렌스틴 아시아태평양연구소의 신기욱 소장이 "나보다 한국말을 더 잘한다"고 할 정도로 한국어 실력도 수준급이다.

이쯤 되면 지한파를 넘어 애한(愛韓)파라 할 만하다.

'한류와 북한에 대한 대중적 관심을 어떻게 한국학 연구로 전환할 것인가'를 주제로 열린 이날 세션에서 주어 부교수는 한국학 연구의 발전과 심화를 위해 한국어 조기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어릴 때부터 한국어를 익혀 능숙하게 구사하는 외국인을 길러야 한다는 것이다.

주어 부교수는 "한국학 연구는 한국에 대한 관심이 있는 학생만 있으면 되는 게 아니다"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물론 그건 굉장히 좋은 일이다.

하지만 고등 수준의 연구를 수행할 수 있고, 그래서 한국과 한반도에 대한 깊은 수준의 이해에 도달할 수 있는 강력한 한국어 능력을 가진 학생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문제는 한국어에 내재한 외국인에 대한 장벽이다.

한국어는 언어학적으로 고립어로 분류된다.

이는 전 세계 다양한 언어 중에서 한국어와 가까운 친척이라 할 만한 언어가 없다는 뜻이다.

이는 한국어를 배우려는 외국인에게는 높다란 장벽이다.

주어 부교수는 미 국무부가 분류한 외국어 가운데 한국어가 '매우 어려운(super-hard) 언어인 4등급 언어에 해당한다고 지적했다.

국무부는 한국어를 아랍어, 중국어, 일본어와 함께 "영어가 모국어인 사람들에게 예외적으로 어려운 언어"로 규정하고 있다.

가장 쉬운 1등급인 프랑스어, 이탈리아어, 스페인어 등이 600∼750시간 수업을 들으면 되는 것으로 돼 있는 반면 4등급인 한국어는 2천200시간 수업을 들어야 한다고 돼 있다.

주어 교수는 "학생들이 대학에 올 때까지 기다리면 너무 늦다"고 말했다.

대학에 온 뒤에야 한국학을 제대로 연구할 수 있는 수준의 한국어를 익히도록 하려면 여기에만 2천200시간을 투자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자신이 18년째 벌이고 있는 미네소타주의 '코리안 랭기지 빌리지' 활동을 소개했다.

코리안 빌리지는 비영리단체인 '콘코디아 랭기지 빌리지'가 운영하는 14개 외국어 교육 프로그램 중의 하나다.

이 랭기지 빌리지는 한국의 '영어마을'과 비슷하다.

간판이나 안내문까지 한국어로 쓰인 공간에서 2주간 몰입형 외국어 교육을 받는 곳이다.

K-팝 등 한류가 큰 붐을 이루면서 2012∼2013년께부터 수강생이 급증했다고 한다.

주어 교수는 "이 프로그램은 유치원생부터 고교 3학년까지 모두가 오는 프로그램"이라며 "미국 전역은 물론 해외에서도 수강생들이 온다.

백인도 있고, 유색인종도 있다"고 말했다.

여기에선 K-팝을 부르고 거기에 맞춰 춤도 추며 한국 음식을 먹고 한국 역사와 정치에 대해 배운다.

하지만 수강생을 120명으로 제한하고 있다.

공간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코리안 랭기지 빌리지는 자체 기숙사가 없어 러시아 빌리지 건물을 빌려서 사용하고 있다.

주어 교수는 한국 정부와 기업의 무관심을 안타까워했다.

콘퍼런스센터에서 이 말을 들은 기자는 갑자기 부끄러워졌다.

주어 교수의 대학(브리티시콜럼비아대학) 시절 지도교수이자 주어 교수에 앞서 코리안 랭기지 빌리지의 촌장이었던 로스 킹 교수는 "한국 정부로부터 지원금을 받기는 받지만 큰 액수는 아니다"라고 말했다.

여기에 보태 기업으로부터의 지원은 거의 전무한 실정이다.

수년 전 핸드백 업체인 시몬느의 박은관 대표가 500만 달러를 내놓은 게 유일하다.

킹 교수는 특히 일본을 비교 대상으로 들었다.

그는 "간단히 말해 오늘날 한국은 일본이 50년 전 투자했던 것의 20%조차 투자하고 있지 않다"면서 "이게 오늘날 미국에서 한국학 연구와 한국어 언어 교육이 그토록 취약한 이유"라고 말했다.

킹 교수는 특히 K-팝 업계가 더 적극적으로 나설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그는 "그들은 (외국의) 젊은이들 사이에 한국어와 한국 문화에 대한 갈증과 열망을 만들었다.

하지만 그 젊은이들은 대학에 갈 때까지 그 갈증을 해결할 방법이 없다"고 말했다.

킹 교수는 이어 "하지만 그들이 대학에 갈 때면 이미 그 갈증이 식었을 테고, 탄탄한 한국학 프로그램을 가진 대학은 소수의 일류 대학들뿐"이라고 부연했다.

K-팝과 K-드라마에 열광하는 외국 젊은이들을 보면서 가슴 한편이 뿌듯함과 자랑스러움의 감정으로 채워지는 경험을 하기 위해서 특별한 애국자의 자질이 필요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가슴 벅참의 감흥에 취해 만족하는 데서 끝나지 않고, 조금 더 먼 앞날을 내다보고 미래에 투자하는 데에는 평범을 넘어선 비범함이 필요할 것 같다.

주어 교수는 이날 세션을 다음과 같은 발언으로 마무리했다.

"스탠퍼드대 교수가 왜 18년간 매년 여름마다 모기에 물리기 위해 미네소타로 가느냐고 묻는다.

내 대답은 무엇보다 내가 오늘날 이 자리에 있도록 해준 사람들, 기회들에 되갚고 나도 미리 베푸는 내 나름의 방식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모두 다음 세대의 학자들에게 투자해야 한다.

그들은 가교의 건설자들이자 평생의 학생이며 친선 대사이자 세계 시민이다.

"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