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표결과에 거취 연결 자충수…'개혁의 기수'서 타도대상 '기득권'으로 전락

마테오 렌치(41) 이탈리아 총리가 올 들어 지구촌을 휩쓸고 있는 포퓰리즘의 또 다른 희생양이 됐다.

상원의원 수와 권한 축소, 중앙 정부 권한 강화를 골자로 한 헌법 개정안을 놓고 4일 치러진 이탈리아 국민투표가 부결됨에 따라 투표 결과에 정치적 생명을 건 렌치 총리는 취임 2년 9개월 만에 사퇴하는 운명을 맞았다.

정치의 고질적인 고비용·저효율 문제가 이탈리아 전체의 발전을 가로막고 있다고 주장하며 현재 하원과 동등한 권한을 지닌 상원을 지역에 기반을 둔 자문 기구 성격으로 축소하는 야심 찬 개헌안을 마련해 국민 앞에 내놓았던 그는 "이탈리아인들이 변화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내 역할은 여기까지"라고 말하며 국민투표 부결 시 자리에서 물러나겠다고 누차 이야기했다.

2014년 2월 중도좌파 성향의 집권 민주당의 내부 권력 투쟁 끝에 이탈리아 역사상 최연소 총리에 오른 그는 취임 초기부터 급진적이고, 즉각적인 개혁 조치를 강조하며 기존 관행을 전면적으로 깨뜨리는 개혁 작업에 나섰다.

민주당의 전통적인 지지 기반인 노조와 좌파의 반발을 사면서까지 쉬운 고용, 쉬운 해고를 보장하는 시장 친화적인 노동개혁을 이끌어냈고, 전방위적인 저항을 무릅쓰고 교육 개혁과 사법 개혁에도 나섰다.

일련의 개혁 작업으로 영어의 '데몰리션 맨'(Demolition Man)을 의미하는 '로타마토레'(Rottamatore·파괴자)라는 별명을 얻은 그는 이탈리아가 미래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2차 대전 종전 후 70년 동안 63차례나 정부가 바뀔 만큼 불안한 정치 체계를 안정시키는 작업이 꼭 필요하다고 보고, 상원 축소와 중앙 정부 권한 강화를 골자로 한 개헌안을 마련했다.

올해 초만 하더라도 개헌안에 대한 찬성률이 60%를 웃돌아 국민투표 통과는 무난할 것으로 예상됐고, 자신감에 넘친 렌치 총리는 국민투표가 부결되면 자리에서 물러날 것이라고 공표했다.

이 발언은 스스로를 옥죄고, 반대파에 빌미를 주는 자충수가 됐다.

지난 6월 치러진 지방선거에서 수도 로마와 이탈리아 제4도시 토리노 시장을 차지하며 기세가 오른 포퓰리즘 성향의 제1야당 오성운동(M5S)을 비롯해 실비오 베를루스코니 전 총리가 이끄는 우파 전진이탈리아(FI), 극우 북부리그 등 야당들은 이 발언을 놓치지 않고 국민투표를 렌치에 대한 신임 투표로 일제히 몰고 갔다.

자신만만하지만 때로는 건방지고, 독선적이라는 평가를 받는 렌치 총리에 대한 개인적 반감과 그의 정책이 오른쪽에 치우쳤다는 불만을 품고 있던 민주당 내의 소수파도 개헌안에 반기를 듦에 따라 렌치 총리는 안팎의 비난에 시달리며 줄곧 어려운 투표 운동을 벌였다.

개헌안에 반대한 같은 민주당 소속의 마시모 달레마 전 총리가 최근 뉴욕타임스와의 회견에서 렌치 총리를 '트위터에 중독된 멍청이'라고 비난한 사례는 그에 대한 당 내부의 감정도 악화될대로 악화됐음을 보여준다.

지난 6월 말 영국의 브렉시트(유럽연합(EU) 탈퇴), 지난 달 미국 대선에서 도널드 트럼프의 당선으로 지구촌에 거세게 분 포퓰리즘 바람은 기득권 엘리트 이미지를 지니고 있는 렌치에게 더욱 불리하게 작용했다.

선동에 능한 오성운동의 창시자 베페 그릴로, 트럼프 당선인처럼 반이민, 자국 우선주의 정책을 펼치는 극우 정당 북부리그의 마테오 살비니 대표는 브렉시트와 트럼프 당선을 지지세력 결집에 이용하며 렌치를 상대로 총공세에 나섰다.

피아트크라이슬러(FCA) 등 이탈리아 주요 기업이 개헌안을 지지하고,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백악관에서의 마지막 국빈 만찬의 주인공으로 렌치 총리를 초청해 힘을 실어주는가 하면 렌치와 유럽 긴축 예산을 둘러싸고 각을 세우던 볼프강 쇼이빌레 독일 재무장관까지도 공개적으로 렌치의 승리를 바란다고 언급했으나 이는 렌치가 기득권과 가깝다는 인상을 낳으며 오히려 역효과를 일으켰다는 평가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지난 8월까지만 하더라도 찬성이 반대를 10%포인트 가까이 상회했던 여론조사 결과는 시간이 갈수록 반대 진영 우세 쪽에 힘이 실린 것으로 나타났다.

9월 말 조사에서는 찬반이 팽팽해지더니 10월부터는 급기야 반대가 소폭 앞서기 시작했고, 여론조사 최종 공표일인 보름 전 발표된 조사에서는 반대가 찬성을 5∼11% 앞선 것으로 드러났다.

2009년 피렌체 시장에 당선되며 이탈리아 정계에 이름을 알린 렌치는 훤칠한 외모에 청바지와 가죽점퍼, 복고풍 선글라스 차림을 즐기고, 소셜 미디어로 자신의 생각을 가감없이 밝히는 참신함으로 취임 초기 젊은 세대의 폭발적인 지지를 얻었다.

총리 취임 당시 스스로를 개혁을 위해 중앙 정치 무대에 진출한 '아웃사이더'로 칭한 그가 결국 기득권이라는 꼬리표가 붙은 채 특히 청년 실업에 허덕이는 젊은층으로부터 타도의 대상이 된 것은 아이러니하다.

로마 루이스 귀도 카를리 대학의 지오바니 오르시나 정치학 교수는 렌치 총리의 패배를 전망한 영국 일간 가디언 인터뷰에서 "렌치가 젊은 개혁론자에서 기득권층으로 인식된 변화는 놀라울 정도"라고 지적했다.

렌치 총리는 브렉시트 직후의 언론 인터뷰에서 "이탈리아 국민투표는 브렉시트 투표와 같지 않다.

영국의 경우 불만이 많았던 EU에 대해 의견을 묻는 투표였던 반면 우리 투표는 30년 동안 필요성을 느껴온 헌법 개혁에 관한 것"이라고 말하며 투표 가결을 자신했었다.

그러나, 그는 결국 세계적인 포퓰리즘 득세 분위기 속에 포퓰리즘 성향의 야당들이 주도한 협공에 밀려 결국 브렉시트 직후 짐을 싼 데이비드 캐머런 전 영국 총리의 전철을 밟게 됐다.

(로마연합뉴스) 현윤경 특파원 ykhyun14@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