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세계 가계에서 작년 팬데믹(전염병의 세계적 대유행) 발생 이후 지난달까지 추가로 저축한 돈이 5조4000억달러(약 6043조원)에 달하는 것으로 추산됐다. 빚을 갚거나 지출한 뒤 남은 돈이 그만큼 많다는 의미다. 각국의 봉쇄령이 해제되면 세계 시장에서 소비가 폭발적으로 늘어날 것이란 관측이 나온다.
코로나 이후 못쓴 돈 6000조원…"글로벌 소비 빅뱅 온다"

“초과 저축 3분의 1만 써도 활황”

미국의 신용평가회사 무디스는 18일(현지시간) 글로벌 가계의 초과 저축액이 5조4000억달러로 세계 국내총생산(GDP)의 6%에 이른다고 밝혔다. 초과 저축은 2019년 소비 수준과 비교해 추가로 늘어난 잔액의 합계를 말한다.

저축액이 크게 늘어난 것은 경기 불확실성이 커지면서 가계가 지출을 줄인 데다 지역 봉쇄로 돈을 쓸 곳도 마땅치 않았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미국, 유럽 등이 대규모 부양책을 내놓은 것도 가계 소득을 끌어올린 요인으로 분석됐다.

각국에서 경제활동이 재개되면 상품 및 서비스 구매 수요가 급증할 것으로 예상되는 배경이다. 마크 잔디 무디스 수석 이코노미스트는 “코로나19 여파로 수요가 상당히 억눌려왔기 때문에 경제 재개 후 한꺼번에 분출될 수 있다”며 “소비자들이 초과 저축액의 3분의 1만 써도 올해와 내년 세계 생산량을 2%포인트 이상 높일 수 있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무디스에 따르면 지난해 대다수 국가의 가계에서 총소득 대비 저축률이 상승했다. 아일랜드 스위스 스웨덴 네덜란드 등 일부 유럽 국가의 저축률은 20% 안팎에 달했을 정도다. 글로벌 경제는 이미 빠른 회복에 대한 기대를 감추지 않고 있다. 민간 비영리 조사기관인 콘퍼런스보드에 따르면 올 1분기 세계 소비자신뢰지수는 108로 작년 4분기(98) 대비 10포인트 상승했다. 2005년 통계를 내기 시작한 후 최고치다. 조사 대상 65개국 중 49개국에서 소비 심리가 개선됐다. 데이나 피터슨 콘퍼런스보드 수석 이코노미스트는 “대다수 국가에서 백신 공급과 함께 경기 회복 조짐이 완연하다”고 진단했다.

초과 저축 주도한 건 미국, 유럽

팬데믹 이후 저축이 가장 많이 늘어난 국가는 북미와 유럽인 것으로 나타났다. 이들 국가의 소비 시장이 먼저 활기를 띨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세계 최대 경제대국인 미국의 초과 저축액은 2조달러 이상으로 집계됐다. 지난달 중순부터 각 가정에 지급된 1인당 1400달러의 현금 지원(총 4100억달러) 효과는 빼고 계산한 숫자다. 2000~2019년 미 가계의 저축률은 평균 6%대 초반에 그쳤지만 작년엔 16%대로 급등했다. 4조달러가 넘는 부양 자금을 쏟아부은 덕분이다.

영국계 투자은행인 바클레이즈의 실비아 아다냐 이코노미스트는 파이낸셜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여러 국가 중 미국의 초과 저축액이 특히 많은데, 백신 접종률 역시 빠르기 때문에 조만간 소비가 크게 늘어날 것”이라고 예상했다. 그는 “아스트라제네카 백신 부작용 논란 등으로 백신 접종이 더뎌진 유로존(유로화 사용 19개국)에선 올 3분기까지 소비가 크게 늘지는 않을 것”이라고 했다.

선진국 내에서도 자산·소득 규모별 저축률 편차가 심했다. 팬데믹 기간에 부익부 빈익빈 현상이 ‘K자’ 형태로 심화했다는 지적이다. 경제분석 기관인 더모닝컨설트는 상위 15개 경제부국에서 올 1~4월 소비 심리가 개선됐지만 저소득층의 생활 여건은 작년 같은 기간보다 악화했다고 진단했다.

얀 하치우스 골드만삭스 수석 이코노미스트는 “미국 초과 저축액의 3분의 2 이상이 상위 40%에 집중돼 있다”며 “부유층의 저축은 소비되기보다 은행 잔액에 그대로 남아 있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경기 회복에 크게 기여하지 못할 수도 있다”고 했다.

뉴욕=조재길 특파원 road@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