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먹인생을 산 프로 복서가 명상록과 문학서적을 탐독한다면 어떻게 보일까.

매우 고상한 장면이긴 하지만 상식적으로 기대하기 어려운 모습이다.

한국에서 타이틀을 뺏긴 WBF미들급 챔피언이었던 니노 벤베누티가 시를 즐겨 읽는다 해서 화제가 됐던 것도 바로 그런 상식때문이었다.

그러나 상식이란 것도 편견에서 나온 경우가 많고 보면 반상식이 나쁠 것도 없다.

그런 의미에서 "허리케인 카터"에 나오는 흑인복서의 고매한 얼굴은 상식파괴의 표본이라 할 만하다.

주인공 루빈 카터의 성숙된 인간상은 그의 직업이나 전력으로 볼 때 상식을 크게 벗어나 있다.

소년원을 탈출한 전과자에다 복서로서 링을 벗어나지 못했던 그가 수감생활을 하면서 틈만 나면 타자기를 두들기는 모습을 보이니 말이다.

옥중에서 "나의 투쟁"을 썼다는 아돌프 히틀러의 모습이랄까.

면회온 흑인소년에게 토스토예프스키와 에밀 졸라의 문학을 말하며 인생을 논하는 데선 할 말을 잃는다.

성서문구를 채용한 "증오가 나를 감옥에 갇히게 했으나 사랑이 나를 자유롭게 했다"는 말도 영화적 허구의 한계를 벗어났다.

이 영화는 인종차별의 덫에 걸려 살인죄를 뒤집어 쓰고 억울한 옥살이를 하는 흑인 프로복서의 이야기다.

끈질긴 결백투쟁끝에 자신의 무죄를 입증한다는 내용인데 사회부조리에 대한 고발극 성격이 강하다.

따라서 주인공을 "유식한 복서"로 미화한 것은 일종의 양념일 수 있겠으나 바닥인생을 산 복서에게 지성미를 부여한 것은 지나친 각색으로 보지 않을 수 없다.

그런 중에도 주인공의 인상은 매우 강렬하다.

감옥생활 22년을 꼿꼿하게 보내는 덴젤 워싱턴의 연기가 영화의 품격을 살리고 있다.

흑인 배우로는 드물게 이목구비가 뚜렷한 그는 프로 복서의 투지와 억울한 죄인의 분노를 여유있게 소화하며 나이든 장기수의 성숙미를 무리없이 보여준다.

아쉬운 것은 그가 무식한 양심범이 아닌 유식한 사상범으로 비춰졌다는 점이다.

이런 범죄조작 고발은 어차피 사필귀정으로 끝나게 마련이다.

가해자의 음모가 벗겨지며 피해자는 누명을 털고 밝은 세상을 만난다는 공식은 이 영화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노장 노만 주이슨 감독은 그것만으론 미흡했던지 "정의 실현"이라는 문구가 새겨진 미국 연방법원의 웅장한 석조물을 필요이상으로 장시간 보여준다.

일찍이 "지붕위의 바이올린" "신의 아그네스"등 명작을 남긴 주이슨 감독이 나이가 들면서 많이 변한 것 같다.

혹시 위대한 미국의 신봉자가 되지는 않았는지.

무력한 흑인복서의 인간승리를 밀도있게 보여 줬다는 점에선 박수를 치고 싶으나 완력의 승부사를 철학적 사상가로 변신시킨 것은 그다지 순수해 보이지 않는다.

편집위원 jsrim@ ked.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