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체는 조립산업인 데 비해 화학은 기초산업이어서 ‘기술 축적의 시간’이 더 많이 필요합니다.”(안기현 반도체산업협회 상무)

"日 정밀화학 100년 이상 기술 축적…한국이 단숨에 따라잡기 어려워"
한국의 반도체·디스플레이 경쟁력은 일본 업체를 따라잡은 지 오래다. 하지만 관련 소재 국산화율은 50%에 불과하다. 정밀 공정으로 갈수록 일본에 대한 소재 의존도는 더욱 높아진다. 업계에서는 100년 이상의 역사를 자랑하는 일본 정밀화학 업체들과 후발주자인 국내 중소기업은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다고 지적한다.

먼저 기술 축적의 시간이 다르다. 일본 정부가 한국으로의 수출을 규제하겠다고 한 고순도 불화수소는 반도체 회로의 패턴 가운데 필요한 부분만 남기고 불필요한 부분은 깎아내는 식각 공정에 사용된다. 일본 스텔라, 모리타의 글로벌 시장 점유율은 90%에 달한다. 국내 업체로는 솔브레인 등이 있다. 하지만 이들도 원재료는 일본 업체에서 들여온다. 반도체업계 관계자는 “불화수소는 모든 물질을 녹여버리는 특성 때문에 ‘관리 노하우’도 제조 기술 못지않게 중요하다”며 “100년 넘게 정밀화학 소재를 만들고 관리해온 일본 업체들이 경쟁력을 갖춘 부분”이라고 설명했다.

포토 리지스트(감광액)는 웨이퍼 위에 회로를 인쇄하는 노광 공정의 핵심 물질이다. 일본 스미토모, 신에츠, JSR 등이 삼성전자 SK하이닉스의 주요 구매처다. 국내에서도 금호석유화학, 동진쎄미켐, 동우화인켐 등이 생산하고 있다. 하지만 이들 업체는 후발주자다. 상대적으로 공정 난도가 낮은 영역에서는 국내 업체들의 제품도 쓸 만하지만 차세대 장비인 EUV(극자외선) 노광장비에는 일본산 감광액이 필수다.

화학산업 사이클에서 ‘시차’도 존재한다. 일본 JSR은 생존을 위해 고부가가치 정밀화학으로 ‘체질개선’에 성공한 사례다. 이 회사는 금호석유화학에 합성고무 기술을 전수한 곳이다. 1990년대 말 한국과 중국 업체들이 범용 화학제품 시장에서 무섭게 성장하기 시작했다. 더 이상 범용 제품에선 승산이 없다고 판단한 JSR은 정밀화학으로 눈을 돌렸다. 합성고무 1t은 150만~200만원 수준이지만 감광액은 갤런당 350만원에 달할 정도로 고부가가치 제품이다.

반면 국내 대기업은 범용 제품을 중심으로 ‘규모의 경제’를 실현해 성장했다. 일본 화학업계와는 아직 기술 격차가 큰 이유다. 최근 국내 대기업들이 시장에 뛰어들기도 했다. 코오롱인더스트리와 SKC는 폴더블 스마트폰 시장이 본격적으로 열릴 것으로 보고 투명 폴리이미드(PI) 필름을 개발했다. 하지만 제품 완성도와 양산 시기 등의 문제로 삼성전자의 기준을 충족하지 못했고, 결국 삼성전자는 갤럭시폴드에 스미토모화학의 PI 필름을 적용하고 있다.

고재연/강현우 기자 yeo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