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정부가 지난 9월 평양 남북한 정상회담에 총수나 전문경영인이 동행한 국내 주요 그룹들에 대북 사업 계획에 대한 보고를 요구한 것으로 확인되면서 파문이 일고 있다. 정부 요청으로 방북한 기업들은 미국의 제재 ‘워치리스트’에 올라 대미(對美) 사업에 타격을 입지 않을까 전전긍긍하고 있다. 재계에서는 “정부가 유엔과 미국의 대북 제재가 완화되지 않은 상황에서 무리하게 총수들을 방북단에 포함시켜 결과적으로 애꿎은 기업들만 피해를 보는 게 아니냐”고 볼멘소리를 냈다.

1일 재계에 따르면 총수나 핵심 경영인이 평양 남북 정상회담에 동행한 삼성그룹과 현대자동차그룹, SK그룹, LG그룹, 포스코그룹, 현대그룹 등 6개 그룹은 지난 주말부터 이번주 초까지 주한 미국 대사관으로부터 “다음주 중 대북 사업 계획에 대해 콘퍼런스 콜(전화회의)을 진행할 예정이니 자료 준비를 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미 대사관은 실무급 대북 사업 담당자를 회의에 참석시켜 달라고 주문했다. 회의 방식은 방북 그룹이 모두 참여하는 전화회의 가능성이 큰 가운데 순차적으로 개별 접촉하는 형식을 취할 수도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미 대사관의 한국 기업 접촉은 미 재무부가 주도하는 것으로 알려지면서 국제사회의 대북 제재와 관련된 것이라는 관측이 나오고 있다. 미 대사관이 우리 정부를 통하지 않고 기업을 직접 접촉한 것은 이례적인 일이라는 평가다. 미 재무부는 지난 9월에도 국내 7개 국책·시중은행과 전화회의를 열고 “북한과의 금융 협력 재개는 미국 정책과 일치하지 않는다”며 대북 제재 준수를 요구했다.

재계에선 “방북 전부터 걱정하던 일이 결국 터졌다”고 우려하는 분위기다. 평양 남북 정상회담을 앞두고 임종석 대통령 비서실장까지 나서 “경제인들도 꼭 함께했으면 좋겠다”고 하자, 기업인들은 “북한에 가면 미국 정부에 찍히고, 안 가면 한국 정부에 찍힌다”고 곤혹스러워 했다. 미 대사관으로부터 연락을 받은 한 그룹의 대관 담당 임원은 “평양 남북 정상회담 당시 구체적인 남북 경협에 대한 논의는 없었던 것으로 알고 있다”며 “대북 사업 관련 임원이 미 대사관 측에 사실대로 설명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방북 기업들의 주력 사업이 전자와 자동차, 정유·화학, 철강 등으로 미국과의 거래가 많은 분야여서 해당 기업들은 미 대사관의 연락 자체를 무언의 압박으로 받아들이며 바짝 긴장하는 분위기다. 재계 관계자는 “과거부터 대북 사업을 해온 현대그룹을 제외한 5개 그룹은 모두 미국에 제품을 수출하고 현지에 공장을 가동하고 있다”며 “미국 측의 대북 사업 보고 요청에 큰 부담을 느낄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김보형 기자 kph21c@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