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방에 도움도 안 되면서 수도권을 어렵게 하는 정책(규제)은 풀어야 한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2003년 취임 100일 기자회견에서 한 말이다. 노무현 정부는 수도권 규제를 풀어 경기 파주에 LG디스플레이(당시 LG필립스LCD) 공장을 짓게 했다. 파주는 수도권정비계획법상 대기업 공장 신·증축이 제한돼 있었고, 휴전선 근처여서 군사시설 관련 제약 조건이 많았다. 다른 지방자치단체들은 반발했고 국방부도 난색을 보였다. 하지만 정부는 한시적으로 시행령을 개정하고 군사시설을 이전하며 밀어붙였다. LG디스플레이는 2006년 파주공장 완공 이후 협력업체를 포함해 5만여 명의 고용을 창출했다. 당시 파주 인구의 7분의 1 규모다. LG디스플레이는 파주공장 가동에 힘입어 2009년부터 LCD(액정표시장치) 출하량을 기준으로 일본과 대만 업체를 제치고 글로벌 1위 기업으로 발돋움했다.
그래픽=한성호 기자 sungho@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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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권 규제는 혁신성장과 일자리 창출의 주요 걸림돌로 꼽힌다. 세계가 ‘메가시티(mega city)’끼리 경쟁하는 상황에서 한국은 ‘수도권 대 비수도권’의 대결 구도에만 매몰돼 있다는 의견이 제기된다. 규제도 엉뚱한 결과만 낳았다는 지적이 나온다. 수도권을 규제해 지역별로 산업 균형을 꾀한다는 게 규제의 논리지만 기업들은 지방으로 옮기는 대신 잇따라 생산기지를 해외로 이전하고 있다. 결과적으로 국가경쟁력 강화와 지역 균형발전 모두 놓치는 형국이다. 전문가들은 수도권의 경쟁상대는 해외 대도시권이라는 현실을 직시하고 과감히 규제를 풀어야 한다고 주문했다. 전체 취업자의 절반 가까이 몰린 수도권에서 규제완화로 일자리를 창출해야 현재의 ‘고용 참사’를 가장 효과적으로 해결할 수 있다는 의견도 나온다.

수도권 집중 못 막는 수도권 규제

수도권 규제는 1982년 공포된 수도권정비계획법에 따라 30년 넘게 시행되고 있다. 수도권을 과밀억제권역, 성장관리권역, 자연보전권역으로 구분해 규제하고, 총량규제와 대규모 개발사업 승인을 통해 인구 집중 유발시설의 입지를 억제하는 내용이 골자다. 과밀억제권역은 공업지역 지정이 금지되고 성장관리권역과 자연보전권역은 정부 허가를 받아야 공장을 지을 수 있다. 수도권에 4년제 대학을 신설할 수 없고, 지방대학의 수도권 이전도 금지된다. 이 밖에 ‘산업집적 활성화 및 공장 설립에 관한 법률’ ‘군사시설보호법’ ‘팔당특별대책지역’ 등 겹겹이 규제에 둘러싸여 있다.

하지만 이 같은 규제는 수도권 집중을 막지 못하면서 기업 투자만 저해하고 있다는 지적을 받는다. 국회 국토교통위원회 소속 임종성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지난 8일 국토교통부에서 받아 공개한 ‘2020년 수도권지표 달성예상률’ 자료에 따르면 2006년 고시된 ‘제3차 수도권정비계획’은 올해 기준으로 정책목표 9개 중 7개가 미달인 것으로 나타났다. 계획상 수도권 인구 비중은 2004년 47.9%에서 2020년 47.5%로 0.4%포인트 감소하게 돼 있다. 그러나 통계청 추계로 산정된 2020년 수도권 인구 비중은 오히려 2.2%포인트 증가한 49.7%로 예상됐다. 소득 대비 주택가격 수준(PIR)은 2001년 5.7배에서 2020년 3.5배로 줄이는 것이 계획상 목표였지만, 2017년 기준으로 오히려 6.7배로 늘었다.

임 의원은 “수도권정비계획은 비경제적, 비합리적, 비논리적, 비환경적”이라며 “더 이상 수도권을 규제할 명분이 없다”고 지적했다.

해외로 내몰리는 기업들

수도권 규제는 기업들을 지방으로 이전시키기보다 해외로 내몰거나 투자를 포기하도록 부추기고 있다. 한국경제연구원이 2015년 수도권에 투자 의사를 밝혔던 118개사를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수도권 규제로 투자 계획을 철회했거나 공장을 해외로 이전한 기업은 28개에 달했다. 지방으로 옮긴 기업(9개)의 3.1배였다. 천안시에 따르면 수도권에서 인근인 천안으로 이전한 기업은 2010년 60개에 달했지만 2016년 5개에 그쳤고 2017년 이후로는 1개도 없다.

수도권 규제는 해외 기업 유치에도 걸림돌이 되고 있다. 정유섭 자유한국당 의원은 지난달 인천경제자유구역을 수도권 규제에서 제외하는 것을 골자로 한 ‘경제자유구역의 지정 및 운영에 관한 특별법’ 개정안을 대표발의했다. 수도권 규제로 경제자유구역 본래 취지인 외국인투자기업 유치가 부진하기 때문이다. 인천경제자유구역청에 따르면 2016년 말 기준으로 인천경제자유구역 입주기업 2353개 중 외투기업은 5.3%인 124개에 불과했다. 이 중 상당수는 ‘무늬만 외투기업’으로 의심받고 있다.

선진국은 규제완화 나서는데…

선진국들은 수도권 규제완화에 앞다퉈 나서고 있다. 일본은 2002년 수도권 규제법인 ‘수도권 구시가지의 공장 설립에 관한 법’을, 2006년 ‘공업재배치 촉진법’을 폐지했다. 그 대신 2002년 도시재생특별조치법을 제정해 수도권 개발에 적극 나서고 있다.

영국은 1982년 수도권에 대한 공장개발허가제를 폐지한 데 이어 2000년대 들어서는 템스강 하구를 성장주도지역으로 개발하는 ‘템스 게이트웨이 플랜’을 추진하고 있다. 프랑스는 1982년 수도권에 공장을 신축할 때 과밀부담금을 매기는 ‘르드방스 규제’를 없앴다.

한국만 ‘갈라파고스 규제’에 갇혀 있는 사이 수도권 경쟁력은 갈수록 떨어지고 있다. 글로벌 컨설팅사 AT커니가 도시의 미래 성장 잠재력을 평가하는 ‘글로벌 도시 전망(GCO)’ 순위에서 서울은 128개 도시 중 2015년 10위에서 2016년 32위, 2017년 38위로 하락했다.

이상호 한국건설산업연구원장은 “도시 경쟁력은 국가 경쟁력으로 이어지는데 서울 등 수도권의 매력은 갈수록 떨어지고 있다”며 “수도권 규제를 서둘러 풀어야 한다”고 말했다.

임도원 기자 van7691@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