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극에서는 북극곰이 최고 실세다. 500㎏에 달하는 육중한 덩치를 가졌지만 이들은 뛰어난 시각과 후각,수영 실력,철저한 관찰에 근거한 사냥 전략으로 바다표범을 공략한다.

사전에 먹잇감의 습성과 서식지 등을 완벽하게 파악하는 것은 기본이다. 이들의 사냥 능력은 역시 자연선택에 의한 진화에서 비롯됐다. 예를 들어 북극곰은 불곰이 북쪽으로 올라와 자리를 잡은 종인데 눈과 얼음 속에 몸을 숨기기 좋은 엷은 털 빛깔의 곰만 살아 남았다. 또 이빨과 발톱을 더욱 날카롭게 키워 북극 최강자의 자리에 등극할 수 있었다.

M&A(기업 인수 · 합병) 시장의 성공적인 포식자들도 이 같은 진화과정을 거쳤다. 수차례의 시행착오와 경험을 통해 상대방의 행동 패턴을 세밀히 관찰하고 약점이 발견되면 빠르고 집요하게 달려들어 딜을 성공으로 이끄는 능력을 키워왔다. M&A가 DNA가 되어버린 기업들의 사냥 솜씨는 밀림의 포식자 못지않다.

물론 M&A 성공이 해당 기업의 궁극적인 성공으로 이어진다는 보장은 없다. 하지만 원하는 시기에 원하는 기업을 얻어야 포식자로 살아 남을 가능성이 높아진다는 측면에서 M&A 전략 자체의 중요성을 간과할 수는 없다.

# 피말리는 교차딜

두산의 CFP(Corporate Finance Project)팀은 사냥을 할 때 그룹의 두뇌요 이빨이다. 두산그룹 M&A의 야전사령관인 박용만 두산인프라코어 회장이 "내가 가장 사랑하는 팀"이라고 말하는 조직이다. 국내 최대 규모 크로스보더(cross-border) M&A로 유명한 밥캣 인수전을 살펴보자.

룰은 이랬다. 물건을 사려고 하는 사람은 각각 다른 장소에 베이스캠프를 차린다. 파는 사람이 양측의 베이스캠프로 연락을 해온다. "상대방이 당신들보다 더 비싼 가격을 불렀다. 가격을 높일 의향이 있나?" 구체적인 액수는 알려주지 않는다. 그런 식으로 수차례 가격을 높여 부르다 한쪽이 포기하면 딜은 끝난다.

뉴욕의 한 호텔에 베이스캠프를 차린 박 회장 일행은 밥캣 매각주간사로부터 네 번이나 전화를 받아야 했다. 경쟁자였던 세계 3위 중장비업체 테렉스(Terex)가 계속 가격을 높여 부르며 따라붙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두산은 테렉스가 쓸 수 있는 금액에 한계가 있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더 이상 투자했다가 주가가 떨어지면 주주들이 당장 소송을 걸게 분명했기 때문이다. 이미 CFP팀을 통해 테렉스가 최대 얼마를 쓸 수 있는지 계산해 놓은 상태.네 번째 연락이 오자 박 회장은 그 금액을 조금 넘는 가격을 불러 놓고 결과를 기다렸다. 49억달러였다. 예상은 맞아떨어졌다. 약 5000만달러 차이로 승패가 갈렸다.

# 박빙의 승부

사냥의 기본은 관찰이다. 신한금융지주가 LG카드를 인수할 때 경쟁자였던 하나금융지주와의 가격차이는 주당 300원에 불과했다. 하나금융지주가 써낼 가격을 미리 알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하나금융지주는 LG카드 인수전에 뒤늦게 뛰어들었다. 자금 마련이 쉽지 않았던 하나금융은 인수계획안을 갖고 국내의 대규모 투자자들을 찾아다녔다. 하지만 이는 하지 말았어야 할 실수였다. 이미 국민연금,새마을금고,지방행정공제회 등 쟁쟁한 재무적 투자자(FI)들을 신한지주가 선점해 버린 상태였다. FI들은 하나금융지주가 다녀간 뒤 신한지주에 전화를 돌렸다. "안녕하세요,오늘 하나은행에서 다녀갔습니다. 이런 저런 제안을 하고 갔는데 대략 어느 정도 규모의 자금을 마련한 것 같습니다. "

신한지주 실무진은 이렇게 모인 정보를 통해 하나금융지주가 모은 자금의 규모를 추정했고 이를 사야 할 주식수로 역산,하나은행이 지불할 수 있는 가격이 6만7000원대라는 결론을 내렸다. 하지만 변수가 발생했다. 사모펀드인 MBK파트너스가 하나금융지주와 연합하기로 한 것.그래도 신한지주는 포기하지 않았다. 각국의 사모펀드가 카드사를 인수했던 사례를 분석했다. 사모펀드의 목표 수익률을 중심으로 그들이 써낼 수 있는 가격을 역산해 나간 것.7만원을 넘으면 완승이라는 결론이 나왔고 그걸로 끝이었다.

# 시간의 허점

"Respect your volume!(앞으로 당신네들이 우리에게 공급할 물량을 생각해보라)" 2005년 겨울 효성그룹 조현상 전무가 굿이어 본사가 위치한 미국 오하이오를 찾았을 때 협상 상대방인 로라 톰슨은 이렇게 기선을 제압해왔다. 타이어의 중간재인 타이어코드를 직접 생산하던 굿이어는 비핵심사업인 타이어코드 공장을 매각하려 했고,효성은 그 공장을 인수해 굿이어에 납품한다는 계획을 갖고 있었다.

협상이 시작됐지만 '오하이오에 뼈를 묻겠다'고 할 정도로 애사심이 컸던 로라 톰슨에게 빈틈이란 찾아볼 수 없었다. 하지만 어느 상대에게나 약점은 있는 법.조 전무는 굿이어에 시간이 약점이라는 점을 간파했다. 자동차 시장 침체로 실적이 악화되자 경영진이 채권 투자자들에게 2006년까지 비핵심 자산을 팔겠다고 약속한 것.조 전무는 로라 톰슨에게 "딜을 이 시간까지 끝내도록 노력할테니 우리의 요구도 존중해 달라"며 정공법을 썼고 이는 먹혀들었다.

지난 수년간 밀림 속을 휘젓고 다니며 진화를 거듭해 뛰어난 관찰력과 날카로운 이빨을 갖게 된 한국의 M&A 포식자들.글로벌 금융위기의 한파로 새로운 매물들이 쏟아져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다.

유창재 기자 yoocool@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