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11일(현지시간) 외국환평형기금채권(외평채)의 발행을 연기키로 결정한 것은 미국계 대형 투자은행인 리먼 브러더스의 손실 우려와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의 건강 이상설로 발행 여건이 급속도로 나빠졌기 때문이다.

국내 금융시장을 뒤흔들던 '9월 위기설'이 사실무근으로 이미 판명된 상황에서 무리하게 발행을 강행할 경우 '득'보다 '실'이 더 커 역풍을 맞을 수 있다는 판단에 따른 것이다.

일부에서는 외평채 발행 연기로 하반기 국내 기업의 해외채권 발행이 어려움을 겪을 가능성을 제기하고 있지만 높은 가산금리로 외평채를 발행할 경우에 오히려 기업들의 부담이 더 크다는 분석이다.

◇ 신용경색.북한 문제로 발행 연기

정부의 외평채 발행이 연기된 것은 리먼 브러더스 사태로 국제금융시장의 신용경색이 심화되면서 개발도상국 신용 가산금리가 전반적으로 상승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다 김정일 위원장의 건강 이상설, 북한 핵시설 복구 소식 등 지정학적 리스크도 반영되면서 해외에서 채권을 발행할 때 위험지표로 사용하는 우리나라 외평채의 신용디폴트스왑(CDS) 프리미엄은 연일 상승하고 있다.

실제 지난 10일 아시아시장에서 5년 만기 외평채의 신용디폴트스왑(CDS) 프리미엄은 1.36%포인트(136bp)로 나타나 사상 최고를 기록했다.

이는 지난해 말에 비해서는 0.91%포인트(91bp) 가량 높은 수준이다.

외평채 가산금리도 급등세를 이어가고 있다.

외평채 2013년 만기물의 가산금리는 지난 10일을 기준으로 1.85% 수준까지 올라갔고, 2016년물의 가산금리 역시 1.46%까지 치솟아 종전 최고치인 지난 3월10일의 1.48%에 근접했다.

정부는 외평채 10년물 발행을 추진하면서 당초 미국채 금리에다 1.8%포인트 수준을 더해 결정하려 했으며, 마지노선은 2.0% 포인트 수준을 생각하고 있었지만 투자자들이 추가 금리를 요구하면서 난색을 표해왔다.

신제윤 재정부 국제업무관리관은 "현지 투자자들은 한국 경제 상황이 양호하다는 점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으나 미국 금융시장의 돈줄이 말랐다면서 기대 이상의 금리를 요구해 연기를 선언했다"고 말했다.

당초 외평채 발행 이유의 하나였던 국내 '9월 위기설'이 사그라든 점 역시 굳이 무리하게 외평채를 발행할 필요가 없다는 입장에 힘을 실어줬다.

최종구 재정부 국제금융국장은 전날 열린 브리핑에서 "당초 로드쇼를 나갈 때만 해도 외평채 발행이 시장 안정에 기여할 것이라고 봤는데 이미 '9월 위기설'은 근거가 없다는 것이 밝혀지면서 이미 시장은 안정됐기 때문에 무리하게 외평채를 발행할 이유가 없어졌다"고 말했다.

◇ 기업 채권 발행도 연기되나

일부에서는 정부의 이번 외평채 발행 연기로 하반기 대규모 채권 발행을 앞둔 국내 기업 및 금융기관들이 어려움을 겪을 수 있다는 지적이 제기되고 있다.

외평채 가산금리란 미국 국채수익률에 더해지는 금리로, 국내 금융사나 기업들은 해외채권을 발행할 때 정부 발행 외평채에 어느 정도를 더해서 계산하는 방식을 택하기 때문에 국제시장에서 한국 채권의 기준금리가 된다.

당초 시장에서는 정부의 외평채 발행이 벤치마크가 되면 공기업 및 금융기관들의 해외 채권 발행에도 숨통이 트일 것으로 전망해왔다.

하반기 대기 중인 민간과 공기업은 100억달러 이상 규모의 해외 채권 발행을 준비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정부는 그러나 확대된 가산금리로 외평채를 발행할 경우 오히려 기업들이 해외에서 채권을 발행할 때 부담이 커질 수 밖에 없기 때문에 외평채 발행을 연기할 수 밖에 없었다는 입장이다.

이와 관련해 신 관리관은 "나쁜 조건을 감수하고 이번에 외평채 발행을 강행하면 기업들의 발행조건에도 영향을 미치게 된다"고 말했다.

최 국장 역시 "'9월 위기설'이 사라진 만큼 외평채 발행의 남은 의미는 벤치마크 금리를 제공한다는 건데 벤치마크 금리가 좋으면 (기업들도) 차입하기가 쉬워진다"면서 "그러나 외평채 발행 시도 이전에도 이미 철도공사에서 2억달러 규모의 채권 발행에 성공한 사례가 있다"고 설명했다.

철도공사는 지난 5월 발행한 5년만기 3억달러 글로벌 채권을 추가발행(Re-opening)하는 형식으로 지난 3일 2억달러 채권을 성공적으로 발행한 바 있다.

◇ "시장 호전시 신속 발행"

정부는 이번 로드쇼 기간 중 외국인 투자자들이 한국경제에 대한 믿음을 보여준 만큼 국제금융시장 상황만 호전되면 신속히 외평채 발행 재개에 나선다는 계획이다.

신 관리관은 "투자자들은 한국경제의 상황은 충분히 좋기 때문에 한국물을 매입할 용의가 있지만 현지 시장이 좋지 않기 때문에 높은 금리를 요구할 수 밖에 없다고 한다"면서 "협상 창구는 열어두기 때문에 금리가 우리가 생각했던 수준으로 내려가면 바로 (외평채를 발행) 할 수 있다"고 말했다.

최 국장도 "우리가 외평채 발행을 못했을 때 일부에서 우려할 수 있지만 우리 경제의 펀더멘털을 감안하면 굳이 무리할 필요가 없었다는 평가가 더 많을 것 같다"고 설명했다.

정부는 해외 로드쇼 담당팀이 국내에 들어온 이후에도 1∼2주간 시장 상황을 지켜본 뒤 외평채 발행을 다시 시도한다는 계획이다.

만약 1∼2주 뒤에도 금융시장 불안이 계속될 경우 추후 별도 로드쇼 없이 콘퍼런스 콜 형태로 발행을 시도할 수도 있다는 설명이다.

재정부 관계자는 "이번 외평채는 외환시장 안정을 위한 '실탄' 준비 목적이 아니기 때문에 굳이 언제까지 꼭 발행해야 한다는 제약은 없다"면서 "시장상황이 좋아진다면 언제든지 발행이 가능하다"고 말했다.

(서울연합뉴스) 박대한 기자 pdhis959@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