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명은 손끝에서 태어난다 [고두현의 문화살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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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디지털'의 어원 - 손가락
돌 쥐고 도구 만든 촉각의 상징
동굴 벽화, 숫자 계산, 문자 기록
20세기 버튼에서 21세기 터치로
디지털 혁명 앞당긴 손가락 문명
고두현 시인
돌 쥐고 도구 만든 촉각의 상징
동굴 벽화, 숫자 계산, 문자 기록
20세기 버튼에서 21세기 터치로
디지털 혁명 앞당긴 손가락 문명
고두현 시인
그때까지 잊고 있었다. 인간은 원래 ‘누르는’ 존재가 아니라 ‘만지는’ 존재였다는 것을. 그날 무대에서 잡스는 신제품을 소개한 것이 아니라 손가락 문명의 새로운 페이지를 열었다. 오랫동안 우리는 버튼의 시대를 살았다. 버튼은 한쪽만 작동하는 명령의 문법이었다. 누르면 켜지고 꺼지는 일방적 방식이었다. 이는 세계를 ‘명령 가능한 대상’으로 만들었고, 사용자를 ‘명령하는 자’나 ‘명령을 따르는 자’로 정렬했다.
열 손가락은 십진법의 교과서
그런데 터치는 다르다. 대화에 가깝다. 손가락이 화면을 스치면 화면이 반응하고, 그 반응이 다시 손가락의 속도와 촉감의 밀도를 바꾼다. 이 과정에서는 눈과 손과 머리가 한꺼번에 움직인다. 생각이 손끝으로 내려오고, 손끝에서 다시 생각이 올라간다. 한 방향이 아니라 양방향의 상호작용이다. 이런 변화는 기술의 진화만으로 설명할 수 없다. 그 극적인 변화의 순간은 인간이 세계를 다루는 방식, 문명 자체의 방식이 바뀌는 변곡점이기도 하다.예로부터 문명은 거창한 이념이 아니라 접촉면을 통해 바뀌었다. 인간과 세계가 만나는 가장 오래된 접촉면이 바로 손가락이다. 손가락뼈는 엄지에 2개, 나머지에 3개씩 모두 28개다. 손바닥의 중수골 10개까지 합하면 38개다. 이 뼈들을 긴밀하게 연결하는 관절, 근육, 인대, 신경이 촘촘하게 엮여 있다. 이렇게 복잡한 손가락은 도구를 사용하는 생물학적 역할을 넘어 세계의 문을 여는 열쇠가 되고, 그 문을 잠그는 자물쇠가 되기도 한다.
선사 시대 동굴 벽에 남긴 손바닥 그림과 벽화를 떠올려 보자. 이는 문자 이전의 서명이다. ‘기록’이 시작된 역사 시대의 첫 문장 역시 손가락에서 시작됐다. 손가락은 또 재료를 읽는 최초의 감각기관이다. 점토의 수분, 나무의 결, 돌의 차가움, 털가죽의 미끄러짐…. 우리는 사물의 이름을 익히기 전에 촉감부터 배웠다. 문명의 씨앗은 문자보다 촉각에서 먼저 싹텄다.
손가락은 최초의 계산기이기도 하다. 열 손가락은 몸에 달린 십진법 교과서다. 우리는 어릴 때부터 손가락으로 세며 숫자를 몸에 새긴다. 이렇게 체득한 손가락의 숫자가 상거래, 세금, 시간표 등의 계량 제도로 이어졌다. 주판이나 산가지 같은 계산 도구도 손가락의 연장이다. 문명이 몸에서 시작해 물건으로 옮겨 가고, 다시 규범으로 정해지는 과정을 보면 드라마틱하다.
더 흥미로운 것은 ‘디지털(digital)’이라는 말이 라틴어 ‘손가락(digitus)’에서 왔다는 사실이다. 손가락으로 숫자를 하나씩 세듯이 정보를 하나하나 구분해서 처리하는 방식이 곧 디지털이다. 둘째 손가락인 검지의 이름은 인덱스(index)다. ‘색인’ ‘지수’ 등이 모두 ‘가리킴’에서 태어난 말이다. 색인이 없으면 지식이 흩어지고 만다. 그래서 손가락을 ‘지식의 안내자’라고 부른다.
문자 또한 손가락의 발명이다. 점토판에 새긴 쐐기문자나 파피루스에 찍은 잉크, 죽간 위의 칼자국 문자가 모두 손끝에서 태어났다. 오랫동안 우리는 손가락을 통해 글을 쓰고 생각을 다듬었다. 키보드 시대가 되면서 손가락의 속도가 빨라졌다. 키보드는 인간의 생각을 손의 리듬에 곧바로 투영했다. 터치 시대에는 속도가 더 빨라졌다.
사유의 말단에서 출발점으로
아름다운 음악과 최첨단 기술도 손가락에서 나왔다. 바이올린의 현과 피아노 건반 위에서 손가락은 우리의 감정을 물리학으로 바꾼다. 우리를 눈물짓게 하는 선율은 손가락이 만든 음질의 집합체다. 반음의 섬세한 떨림, 음색의 미묘한 변화 등 인간의 예술은 영감만으로 이뤄지는 게 아니라 수많은 손끝의 반복을 통해 완성된다. 역사를 바꾼 장인의 손은 어떤가. 금속을 다듬는 손과 목재의 결을 만지는 손에서 산업혁명의 불꽃이 일어났다. 그러고 보면 손가락은 작은 신체 기관이지만 문명의 방향을 가장 크게 바꾸는 동력 기관이라고 할 수 있다.20세기는 버튼의 시대였다. 리모컨과 전화, 엘리베이터, 자판기 등의 버튼은 생활의 효율성을 높여줬다. 버튼은 우리에게 선택권을 줬지만, 사실은 정해진 선택지 안에 가두기도 했다. 버튼은 우리를 특정 항목 중 하나를 택하고 그것을 소비하는 ‘메뉴 기반 인간’으로 만들었다. 그 익숙한 문법을 흔든 것이 바로 멀티터치를 통한 ‘손가락 혁명’이었다.
지금 우리는 정보를 ‘보는’ 동시에 ‘만진다’. 지도 위를 이동할 때 우리는 길을 찾는 것이 아니라 길을 ‘끌어온다’. 버튼을 압력으로 누르는 손가락에서 부드럽게 만지며 교감하는 손가락, 명령의 손가락에서 대화의 손가락으로 전환한다. 그사이 애플의 시가총액은 2007년 1740억달러(약 252조원)에서 현재 4조달러(약 5780조원)로 23배나 늘어났다. 이는 한 기업의 제품 혁신 이야기를 뛰어넘어 세상을 대하는 인류 문명의 변화라는 거대 서사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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