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페라적 요소 입은 국립창극단 '심청'
전주세계소리축제와 국립극장 공동 제작
원작 비튼 레지테아터 판소리극의 탄생
"만좌 맹인이 눈을 뜬다. 눈먼 짐승도 일시에 눈을 떠서 광명천지가 되었구나" 판소리극 <심청>에서 늙은 심청과 여성합창이 부르는 마지막 가사다. 요나 김이 연출한 '심청'에서 결국 눈을 뜬 건 심 봉사가 아니었다.
덥고 습한 날씨를 뚫고 남산 자락에 있는 국립극장에 들어서자, 시원한 파도 소리가 마음을 식혀줬다. 3일국립극장 해오름극장 무대에 오른 판소리극 '심청' 현장에는 드넓은 바다를 떠올리는 극장 음향을 통해 공연이 담고 있는 대서사를 암시했다.
객석에 앉자, 무대 위 스크린에서는 시민들의 인터뷰가 흘러나온다. 영상에 등장하는 여러 사람의 심청에 대한 인식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눈먼 아비의 눈을 뜨게 하기 위해 공양미 300석에 목숨을 바친 '효의 상징.' 영상 속 다수의 묘사를 통해, 심청의 착한 이미지를 떠올리게 한 것은 결말의 충격을 배가시키기 위해 연출자가 만든 장치다. 장면마다 깔린 복선은 공연 중에도 계속된다.
갑자기 객석으로 뛰어 들어온 어린이 합창단이 천진한 웃음으로 마냥 떠들기만 한다. 객석에서 '아이들은 좀 저래야지'라는 반응에 박수가 터져 나오는 순간, 암전된 극장에서 격정적으로 빨라지는 징과 풍경 소리는 신선한 경험이었다. 마치 어린 심청에게 다가오는 불길한 판타지로 이끌려 들어 가듯 공연이 시작된다.
국립창극단 '심청'의 제1장 장면 /사진. 국립극장 제공.
제1장 어미의 이른 죽음에서부터 남성과 여성을 철저히 대립시킨다. 심청의 어머니, 곽씨부인의 상가를 배경으로 상복을 입은 여성들이 포대기에 싸인 심청이에게 젖동냥을 해준다. 그 모습을 배경으로 화투판을 벌이는 남성들은 동정이라는 감정을 갖지 못한 괴물로 다가온다.
아비에 대한 효심으로 살아가는 심청에게 안하무인으로 수양딸로 삼겠다는 말을 세 번이나 반복하는 장승상댁의 등장신은 계급에서 오는 숨 막히는 벽을 느끼게 한다. 눈을 뜨기 위해 딸을 공양미 300석에 제물로 바치는 심 봉사는 원작과 달리 평생 눈을 뜨지 못하는 난봉꾼으로 등장한다.
연출자 요나 김은 다양한 미장센 기법을 통해 자신의 해석을 드러낸다. 영상을 담당한 벤야민 뤼르케가 무대 위를 활보하며 장면을 촬영해 무대 위에 송출한 '극 중 중계' 기법은 창극과 독립영화를 동시에 보는듯한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국립창극단 '심청'의 한 장면 /사진. 국립극장 제공.
국립창극단 '심청'의 한 장면 /사진. 국립극장 제공.
영상을 통해 노출된 여러 소품과 무대는 원작과는 다를 것이라는 작품의 열린 결말을 기대하게 했다. 제2장 '거래'에서 영상으로 보여준 심 봉사의 집 벽에는 어린아이가 그린 그림과 낙서들이 즐비했다. 부모에 대한 효심과 남다른 희생정신으로 팔려 가는 심청이도 한 명의 어린 소녀일 뿐이라는 것을 은유적으로 드러낸다. 한 승려가 냉장고에서 연꽃을 꺼내는 장면은 원작에서 연꽃에 쌓여 부활하는 심청의 부활을 암시했다.
국립창극단 '심청'의 한 장면 /사진. 국립극장 제공.
반면에, 인간에게 생존을 위해 필수적으로 여겨지는 의식주에서 '의'와 '식'을 의미하는 옷장과 냉장고에 놓인 소품들이 심청의 비극적 운명을 은유했다. 제5장 '제물'에서 인당수에 빠진 심청이 죽자 상복이 가득 걸렸던 옷장을 가득 채운 촛불과 쓰러진 냉장고 속 여자아이 인형은 인당수에 제물로 바쳐진 어린 영혼들을 기리는 듯 섬뜩한 느낌을 자아냈다.
국립창극단 '심청'의 뺑덕어멈 /사진. 국립극장 제공.
오페라 연출자가 본업인 요나 김의 손에서 탄생한 작품 속에는 오페라의 한 장면이 떠오르는 순간도 있었다. 제6장 '새 아내'에서 뺑덕어멈과 심 봉사가 신혼을 즐기는 장면은 2005년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에서 윌리 데커가 연출한 베르디 <라 트라비아타>의 안나 네트렙코와 롤란도 빌라존을 연상케 했다.
공연의 작창과 음악을 맡은 한승석은 한국인의 정서에 익숙한 구전 음악을 단조 풍으로 재탄생시켜 새로운 판타지를 입혔다. 이야기의 중심이 심봉사로 전개되는 공연 후반부에서, 뺑덕어멈이 돈을 들고 도망가기 전 '꼭꼭 숨어라 머리카락 보일라'의 가사로 쓰여진 숨바꼭질 멜로디를 사용했다. 어린 심청의 영혼이 그림자로 등장하는 장면에서는 '자장가'를 모티브로 음산한 음악이 흘러나온다.
심 봉사가 난봉꾼으로 전락하는 제7장에서는 이태백이 놀던 '달아 달아 밝은 달아'가 사용된다. 판소리 심청의 백미로 유명한 '범피중류'는 여성들의 떼창으로 새롭게 쓰였다.
170분간 진행된 이날 공연에 출연한 배우들은 모두 훌륭했다. 전통 악단과 서양 악기들로 구성된 오케스트라가 특이하게도 2층 구조로 앉아 연주한다. 지휘자가 없는 창극의 전통 악기 연주자들은 객석을 등지고 앉았다. 나무 채와 부드러운 자루 채를 이용해 9장까지의 장면 전환마다 '난타'를 선보인 5명의 연주자가 집중을 잃기 쉬운 무대 전환 시간에 힘을 실었다.
국립창극단 '심청'의 제 9장 장면 /사진.국립극장 제공.
마지막, 제9장 '눈을 뜨다'에서 4명의 심청이가 무대에 등장한다. "만좌 맹인이 눈을 뜬다"는 소리에 무대 정중앙에 선 심청은 눈가리개를 벗는다. 객석을 보며 담배를 피우고는 국립극장을 나가 자기 삶을 찾아간다. 제4장에서 배우들이 무대 좌우 바닥에 'LESSON OF LOVE'와 'SHE GOT LOVE'를 그렸다. 이 공연은 심청이가 효심이 아니라 '자신을 사랑할것'을 배우는 공연이다.
국립창극단 '심청'의 마지막 장면 /사진.국립극장 제공.
조선시대에 쌀 한 석은 대략 180리터(약 144kg)였다. 이를 기준으로 쌀 삼백 석은 5만4천 리터(43,200kg)다. 2025년 쌀 공급가인 1kg당 4,000원을 적용하면, 약 1억 7,280만원이 된다. 원작 속 심청은 돈 1억여 원에 자신의 생명을 바친 셈이다. 요나 김의 작품에서 '앞을 보지 못한 사람은 심 봉사가 아닌 심청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