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에세이] 쌀 부족, 언제든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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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경식 농협대 교수
한나절 내내 줄을 선 사람들이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자기 눈으로 재고를 확인하지 않고서는 한 발짝도 움직일 수 없다는 기세다. 일부는 가게 유리창을 깨고 안으로 들어가 흩어진 쌀알을 주워 담기도 했다. 2008년 봄 온 나라를 들쑤신 ‘필리핀 쌀 소동’ 사건의 한 장면이다.
필리핀은 세계에서 손꼽히는 쌀 생산국이자 수출국이었다. 국제미작연구소(IRRI) 본부를 두고 전 세계에 신품종 볍씨를 공급한 나라다. 그런 나라가 이제는 쌀 부족국이자 수입국이 됐다. 최근에도 쌀값이 폭등해 식량안보 비상사태가 선포됐다. 논을 없애고 그 자리에 바나나, 파인애플, 망고, 사탕수수 등을 대거 심은 탓이다.
1970년대 후반 한국은 통일벼 때문에 쌀이 남아돌았다. 하지만 기상이변으로 1980년부터 1982년까지 쌀 생산이 연속 줄었다. 그 결과 쌀값이 오르고 보관 중이던 정부미마저 바닥을 보였다. 부랴부랴 50만t의 쌀을 긴급 수입하기로 했다.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t당 200달러를 밑돌던 국제 쌀값이 550달러로 치솟았다. 결국 시세의 세 배를 주고 쌀을 들여왔다.
요즘은 쌀이 남아서 문제다. 그래서 정부가 팔을 걷어붙였다. 생산을 줄이고 소비를 늘리자는 것이다. 그 일환으로 올해 8만㏊(800㎢)의 벼 재배면적을 줄이겠다고 한다. 어떻게든 쌀값 하락을 막아보겠다는 고육책이다. 그러나 여기서 유념해 살펴볼 대목이 있다. 쌀 소비 패턴과 쌀 자급률이다.
대개 쌀 소비는 가구 부문과 사업체 부문으로 구분한다. 가구 부문은 집에서 밥솥으로 지어먹는 집밥용 쌀이다. 사업체 부문은 즉석밥, 떡, 김밥, 도시락 외 각종 가공식품에 소요되는 쌀을 말한다. 1인당 쌀 소비가 줄어든다는 것은 가구 부문만 가리킨다. 사업체 부문의 쌀 소비는 꾸준히 늘고 있다.
작년 한국 쌀 생산량은 358만5000t이다. 가구 부문과 사업체 부문을 합친 전체 쌀 소비량은 대략 376만t이다. 소비량보다 생산량이 적다. 이래서 우리나라는 완전한 쌀 자급국가가 아니다. 쌀이 남아도는 것은 매년 의무적으로 수입하는 물량 탓이 크다. 그래서 쌀 문제 해결을 위한 재배면적 감축은 신중할 필요가 있다. 논은 한번 없애면 복원하기가 힘들기 때문이다
필리핀만 보더라도 나라 곳간 허물어지는 건 한순간이다. 100%에 못 미치는 우리 쌀 자급률도 결코 가볍게 볼 일이 아니다. 식량 이전에 민족정서의 근간을 이루던 쌀. 이 귀한 존재의 순탄한 행로를 위해서는 파부침주(破釜沈舟: 솥을 깨뜨리고 배를 가라앉히다)의 결기도 중요하지만 호시우보(虎視牛步: 호랑이처럼 날카로운 눈으로 소처럼 신중하게 걷는다)의 통찰도 함께 요구된다. 여기에 농민의 이해와 참여, 국민의 든든한 ‘밥심’까지 더해진다면 금상첨화다. 염원은 구호로도 이뤄진다고 했던가. 대한민국 쌀이여, 부디 영원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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