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하 60도, 사체로 벽 쌓고 버텼다…엘리트 교수의 '미친 짓' [성수영의 그때 그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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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콜라스 레리히(Nicholas Roerich)
그 벽 안쪽에는 티베트 원정대의 초라한 텐트가 있었습니다. 여름용 텐트의 얇은 천 너머 스며든 한기는 배낭 속 술병을 얼려서 터뜨렸고, 태엽 시계의 태엽을 망가뜨렸습니다. 원정대원 다섯 명, 동물 90여마리가 이미 추위로 숨을 거둔 상황. 바람을 막기 위해 원정대는 어쩔 수 없이 동물의 사체로 텐트 주위에 방풍벽을 세워야 했습니다. 텐트 안의 사람들은 한데 모여 말없이 떨고 있었습니다.
원정대장의 이름은 니콜라스 레리히(1874~1947). 세계적인 화가이자 탐험가, 고고학자. 인기 요가 수련법인 아그니 요가의 창시자이자 미국 부통령이 ‘나의 아버지’라 부르며 따랐고, 훗날 노벨 평화상 후보에까지 오른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왜 여기까지 오게 된 걸까요. 코끝 시린 겨울을 맞아, 차가운 공기와 눈을 누구보다도 신비롭고 아름답게 표현한 레리히의 이야기를 지금부터 시작합니다.
화가가 나라를 세운다고?
러시아 제국의 수도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상류층 집안 출신인 레리히는 엘리트 코스를 골라 밟은 만능 인재였습니다. 그는 10대 때부터 선사시대 유적 발굴에 참여하며 고고학적 지식을 쌓았고, 대학에서는 법학과 미술을 동시에 전공했습니다. 그림 실력, 법학 지식, 행정력, 정치력을 모두 갖춘 덕분에 그는 1906년 불과 서른두 살의 나이로 러시아 최대 예술 학교(황실 예술 장려 협회)의 학교장이 될 수 있었습니다.1920년 러시아 혁명과 내전으로 인해 미국으로 거처를 옮겨야 했지만, 레리히의 성공은 계속 이어졌습니다. 그는 현지 부자들의 지원으로 뉴욕에 음악, 무용, 미술 등 예체능을 통합해 가르치는 ‘마스터 인스티튜트’를 설립했습니다. 이 학교가 ‘대박’이 나면서 그는 순식간에 뉴욕 문화계의 거물이 됐습니다. 뉴욕 맨해튼에 ‘마스터 빌딩’이라는 29층짜리 빌딩까지 올렸습니다.
이렇게만 설명하면 레리히는 정말 위험한 인물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레리히의 정신이 이상했던 건 아닙니다. 당시 유럽의 지식인 사이에서는 신비주의와 음모론이 한창 유행하고 있었습니다. 세계 곳곳에서 제1차 세계대전과 대공황 같은 혼란이 벌어지는 시대. 사람들은 어떤 보이지 않는 법칙이 있다고 믿고 싶어 했습니다. 더군다나 예술가는 특별한 감수성을 지닌 사람들. 이들이 이상한 상상을 하는 건 그리 특별한 일이 아닙니다. 예나 지금이나 종교, 혹은 독특한 미신에 진지하게 빠져드는 예술가들이 많은 이유입니다.
레리히는 이 거물 ‘제자’들을 등에 업고 거대한 프로젝트를 시작합니다. 미국 농림부로부터 지원을 끌어내 ‘중앙아시아 원정대’를 꾸린 겁니다. 겉으로는 희귀 식물 표본을 모으는 게 목적이었지만, 그의 진짜 목표는 중앙아시아에 ‘이상적인 불교 제국’을 세우는 것이었습니다.
희박한 공기 속으로
1923년 원정대는 인도에서 출발해 히말라야로 향했습니다. 그의 목표는 ‘샹발라(Shambhala)’를 찾는 것. 샹발라는 ‘샹그릴라’의 모티프가 된, 티베트 불교 경전에 나오는 이상향이었습니다. 그곳에 불교 제국을 세우고 여러 종교를 하나로 합쳐 인류를 새로운 정신세계로 이끄는 게 레리히의 목표였습니다. 그야말로 정신 나간 발상입니다. 하지만 레리히와 후원자들은 진지했습니다. 이득을 챙길 꿍꿍이가 있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비록 방향은 좀 이상했지만, 이들의 열정은 그저 순수했을 뿐입니다.레리히가 원정 도중 소련의 수도 모스크바로 향해 장관들을 만난 것도 이런 순수함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소련의 고위 관료들을 만나 이렇게 제안합니다. “내가 아시아에 새로운 불교 국가를 세울 테니 지원해 달라. 그러면 소련과도 친하게 지내겠다.” 그의 머릿속에서 ‘만인의 평등’을 외치는 공산주의와 ‘자비’를 말하는 불교는 서로 공통점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현실은 냉혹한 법. 소련 공산주의의 현실은 그가 생각했던 것과는 여러모로 달랐습니다. 무엇보다도 레리히의 행동은 간첩이나 할 법한 위험천만한 일이었습니다. 그는 세계 각국이 물밑에서 얼마나 치열한 싸움을 벌이는지, 이념 대립이 얼마나 무서운지 짐작조차 하지 못했습니다. 미국과 영국 정보부는 이 모든 과정을 싸늘한 시선으로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설산에서의 다섯 달
레리히가 라싸로 들어가려 한다는 소식에 영국 정보부는 즉시 반응했습니다. 영국 정부는 곧바로 티베트 정부에 통보했습니다. “레리히는 러시아 스파이다. 절대 도시에 들이지 마라.” 그리고 레리히 일행은 티베트군에 포위됐습니다.하지만 레리히는 발길을 돌리지 않고 기다리기를 택했습니다. 곧 오해가 풀릴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는 치명적인 실수였습니다. 영국 정보부는 레리히 일행을 고원에서 말려 죽이기로 작정한 상태였거든요.
하지만 이 생지옥 속에서도 레리히는 그림을 그렸습니다. 오히려 예전보다 그의 작품은 더욱 깊어졌습니다. 야망의 좌절, 죽음에 대한 공포, 고립감, 그리고 희박한 공기와 추위 속에서 희미해지는 정신이 그의 그림에 ‘숭고한 공포’를 불어넣었기 때문입니다. 레리히의 눈에 들어온 산은 이제 정복의 대상이 아니었습니다. 산은 레리히의 운명을 지배하고 압도하는 거대한 대자연이자, 신(神) 그 자체였습니다.
울트라마린, 코발트 바이올렛, 프러시안 블루…. 해발 4600m, 하늘과 가장 가까운 곳에서만 볼 수 있는 차갑고 선명한 색채. 훗날 평론가들은 이 색채를 보고 ‘우주적인 색’이라고 표현했습니다. 미술계에서는 이 시기 작품을 레리히의 최고 걸작으로 평가합니다.
예술가, 몽상가들
이상적인 불교 제국을 세우겠다는 레리히의 허황된 꿈은 좌절됐습니다. 하지만 그 모든 과정이 무의미한 건 아니었습니다. 여행 중 중국 군벌의 만행, 몽골의 파괴된 사원, 도적떼의 살인과 범죄를 목격하며 그의 마음속에는 이런 생각이 자리잡았습니다. ‘문화가 없으면 평화도 없다. 법으로 강제하지 않으면 인류는 결국 모든 아름다움을 부숴버릴 거야.’
안타깝게도 레리히의 말년은 불운했습니다. 1940년 미국 대선을 앞두고 공화당은 레리히의 제자였던 부통령 후보(전 농림부 장관) 헨리 월리스를 공격했고, 레리히와 월리스가 주고받은 ‘비밀 편지’를 폭로하려 했습니다. 월리스는 레리히를 칼같이 ‘손절’한 뒤 “사기꾼”이라 비난하기 시작했습니다. 국세청 등 국가 기관을 총동원한 압박이 들어오자 레리히는 인도로 떠났습니다. 그리고 히말라야를 바라보며 죽을 때까지 그림을 그리다가 73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습니다. 현실 정치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세상이 실제로 어떤 모습인지를 알지 못했던 대가를 치른 것입니다.
그의 예술은 인류가 진리를 더욱 선명하게 볼 수 있도록 도와주기도 합니다. 1961년 인류 최초의 우주비행사 유리 가가린은 우주에서 지구를 처음 본 순간, 항해 일지에 이렇게 적었습니다. “말로 다 할 수 없는 환상적인 색채를 보았다. 마치 화가 니콜라스 레리히의 캔버스처럼!” 몽상가가 그린 비현실적인 색채가, 실은 우주의 진실과 가장 맞닿아 있었다는 것이 증명되는 순간이었습니다.
**이번 기사는 Nicholas Roerich: The Artist Who Would Be King(John McCannon 지음), Altai-Himalaya(레리히 지음) 등을 참조해 작성했습니다.
성수영 기자 syoung@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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