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 온난화의 폐해’, ‘남녀의 양육의 책임의 한계와 허용 범위’, ‘사회적으로 용인되는 워라벨의 균형감’, ‘우울증과 노출증 같은 현대 사회의 정신적 감정적 질병’…….패션 칼럼에서 다루기엔 너무나도 심각하고 진지한 이 주제들을 트렌치 코트를 다루면서 생각하게 되리라고는 전혀 예상치 못했다. 양차 대전을 거치면서 탁월한 방수성은 물론 스타일 측면에서도 인정받아 민간에 큰 인기를 끌어 고안된 지 20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사랑받는 트렌치 코트! 이 의미심장하고 중차대한 옷은 살아남아 사랑 받은 기간만큼이나 깊고도 다양한 화두를 던진다.
ⓒ한국신사 이헌
ⓒ한국신사 이헌
가장 먼저 대두되었던 질문, 지구온난화의 가장 큰 폐해는 무얼까? 심각하고도 무시무시한 거시적인 이야기들이 백만 가지쯤 쏟아지겠지만 절절한 옷 애호가(라고 쓰고 옷 환자라고 읽는다)인 필자에겐 트렌치 코트를 입을 날이 줄어든다는 매우 개인적이고 미시적인 폐해가 가장 먼저 떠오른다. 지구온난화로 인한 극단적인 계절 변화로 소위 간절기, 아니 봄과 가을이라는 계절은 이제 존재감을 찾기 어려워졌다. 아직 찬 바람으로 얇은 옷을 위에 뭔가를 걸치고 싶은 계절, 해가 짧아 커진 일교차로 아침 저녁으로는 꽤나 쌀쌀해 아우터가 반드시 필요한 확연한 봄과 가을 날씨가 도합 일 년에 너 다섯 달은 되던 시절엔 트렌치 코트가 제 노릇을 톡톡히 했더랬다. 낮이 되어 확연히 따뜻해진 날씨를 느끼며 한 팔에 척 걸어도 기분 좋은 트렌치 코트는 꽃놀이 갈 때 꼭 챙겨뒀어야 하는 옷이건만 이제 대한민국 멋쟁이들의 옷장에서 활용도가 현저히 떨어지게 되고 말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트렌치 코트를 입을 결심’을 위해 용기 내는 분들이 있으리라. 물론 소중하게 숨겨야 할 신체 부위를 갑자기 자랑하면서 큰 기쁨 누리는 바바리맨들의 굴절된 용기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 사회적으로 매우 부적절한 그릇된 욕망을 트렌치 코트에 슬쩍 감추지 마시고 신경정신과에서 전문의의 적절한 처치를 받으시길 권하며, 그보다는 오래전 영화 <카사블랑카>에서 사랑하는 연인을 위해 희생을 감수하던 험프리 보가트처럼 근사하게 연출하고 싶은 이들을 위해 트렌치 코트에 대해 좀 더 알아보기로 한다. 더불어 올봄엔 벚꽃이 오래오래 남아 펄럭이는 트렌치 코트 자락에 아름다운 꽃비를 맞게 되기를 바라면서……
영화 <카사블랑카> 스틸컷 ©다음영화
영화 <카사블랑카> 스틸컷 ©다음영화
많은 이들이 오해하고 있는 것과 다르게 트렌치 코트는 원래부터 군용 장비로 탄생한 것은 아니다. 트렌치라는 영단어가 쏟아지는 포화로부터 몸을 숨기는 전쟁용 참호를 일컫는 표현이니 응당 참호전을 위해 개발된 옷이라 추리하는 분들이 많다. 하지만 엄밀하게 말하면 이미 만들어진 옷이 군복으로 적용되면서 점진적으로 필요에 의해 변화 발전했다고 하는 편이 맞겠다. 1차 대전이 일어나기 거의 100년 전인 1800년대 초 찰스 맥킨토시는 방수 코트를 개발하라는 영국군의 요청에 따라 면 원단을 고무로 코팅한 최초의 방수 원단을 개발하고 이를 코트에 적용한다. 방수라는 획기적인 기능을 담은 코트는 대대적인 환영을 받았지만 동시에 땀과 열기도 고스란히 가두는 역할을 하였으니 날이라도 더워지면 견딜 수 없는 냄새를 풍길 뿐 아니라 고무가 더운 열기에 녹아내리면서 활용성이 현저히 떨어져 외면받게 된다.

이에 따라 통기성을 확보하면서 방수가 되는 소재를 향한 연구가 이어지는데 1853년 존 에머리는 훨씬 더 통기성이 좋은 소재를 개발하고 특허를 출원한다. 그리고 이를 활용한 코트 브랜드를 아쿠아스큐텀(Acuascutum, 라틴어로 방수의 의미)으로 정한다. 시간이 흘러 1879년 토마스 버버리 역시 개버딘이라는 원단을 개발하는데 원단 전체가 아닌 개별 섬유 자체에 방수성을 부여해 직조한 트윌 원단으로 통기성을 확보하게 된다. 훨씬 쾌적한 비옷으로서의 가치를 인정 받은 버버리의 방수 코트는 1901년 영국군에 보급되었고 1차 대전 중 참호전을 위해 적용되어 전장에서 활용되면서 오늘날의 클래식 트렌치 코트의 디테일이 더해진다. 바바리라는 트렌치 코트의 우리식 별명도 바로 이 브랜드 버버리에서 비롯되었다.

더블 브레스티드 디자인, 활동성을 보장하는 래글런 소매, 계급장을 부착할 견장, 소총 사격을 위한 어깨의 덧댐, 지도를 보관하는 주둥이가 달린 깊은 주머니, 허리 벨트와 도구를 부착하는 D모양의 링, 소매 안으로 빗물이 들이치지 않도록 막는 소매의 여밈 등 전장의 예상치 못한 비는 물론, 빗발치는 총알과 공포심으로부터 병사를 감싸 주던 디테일이 여태껏 살아남아 우리가 익히 아는 그 멋진 스타일을 완성해 주었다. 그렇게 제2차 세계 대전에도 잘 활용된 후 민간에 뿌려지면서 그 어떤 군용 의복보다 민간 패션에 영향을 많이 미친 전설적인 코트로 남게 되었다.

트렌치 코트는 수도 없는 영화와 드라마 주인공들의 캐릭터를 대변하는 옷으로 등장하면서 많은 사랑을 받아왔다. 앞서 언급한 험프리 보가트 같은 배우의 우수에 찬 사랑꾼 캐릭터뿐 아니라 우아하고 아름다운 여성들의 캐릭터를 창조하는데도 많이 사용되었고 이는 여전히 많은 패션 관계자들에게 트렌치 코트가 유행과 무관하게 지속적으로 소환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특히 누아르 영화와 형사물의 주인공 캐릭터에 자주 활용되었는데. 안방극장에서 볼 수 있던 <형사 콜롬보>나 텔레비전 만화영화 <가제트 형사>, <핑크 팬더> 같은 형사물은 물론 1987년 영화 주윤발의 <영웅본색>에서는 그야말로 그 본색을 드러냈었다. 그 시절을 살았던 이들 중에 길다란 코트자락을 펄럭거리며 성냥개비를 입에 물어보지 않은 이가 없을 정도였으니 분명히 국내 의류 산업에 미친 주윤발의 영향도 상당 했을 것이다.
영화 <영웅본색2> 스틸컷 ©네이버 영화
영화 <영웅본색2> 스틸컷 ©네이버 영화
아쉽게도 이런 트렌치 코트의 이미지는 결코 멋있고 아름답게만 여겨질 수 없었으니 1999년 미국 콜로라도주의 컬럼바인 고교 총기 난사 사건의 가해자들이 기다란 코트 안에 무기를 숨겨 학교에 들여온 것을 계기로 한동안 미국 고교생들에겐 등교시 트렌치 코트가 금지되기도 했었다. 물론 사건의 가해자들이 실제로 트렌치 코트를 입었던 것은 아니었으나 뉴스 보도를 통해 무기를 숨겨 들어간 옷이 트렌치 코트로 잘못 알려지면서 우아하고 멋진 트렌치 코트의 이미지가 실추되는 일이 있었다. 평범한 일상을 보내는 줄만 알았던 대학 입학을 앞두고 있던 두 고교생에게 내재된 극심한 우울감은 길고 무거운 코트로도 감출 수가 없었던 것이었다.

트렌치 코트의 스타일링으로 가장 인상적인 족적은 전형적인 아메리칸 스타일을 만날 수 있는 미국의 영화 <크레이머 대 크레이머>에 새겨졌다. 1979년 당시 전성기의 리즈 시절을 구가하며 열연을 통해 각각 아카데미 남우주연상과 여우조연상을 수상한 배우 더스틴 호프만과 메릴 스트립의 명품 연기가 선보이는 가운데 전형적인 미국, 뉴욕 맨하탄 도시인들의 스타일을 엿 볼 수 있어 필자가 매우 사랑하는 영화다. 사뭇 다른 두 사람의 성격과 생각의 차이, 이혼, 그리고 그로 인한 양육권 다툼이 다뤄진다. 영화가 상영된 후 미국이 직면했던 남녀의 양육의 권리와 책임의 한계 그리고 허용 범위, 삶에서 일과 휴식 간의 균형, 그리고 이혼한 편부모에 대한 사회적 시선 같은 이미 발전을 이룬 사회에서 직면하는 모두가 고민해 보아야 하는 문제를 정면으로 던진 문제작이었다. 오랜만에 뉴욕 센트럴 공원에서 아들을 만나는 메릴 스트립의 단정한 트렌치 코트와 바쁜 삶을 오가며 부지런히 아이를 돌보는 더스틴 호프만의 자유분방한 트렌치 코트 스타일을 눈여겨보면 던져진 사회문제를 바라보는 두 등장인물의 생각과 삶을 대하는 태도를 엿볼 수 있다.
영화 <크레이머 대 크레이머> 스틸컷 ©Rex Features
영화 <크레이머 대 크레이머> 스틸컷 ©Rex Features
오우 트렌치 코트에 이렇게나 많은 우리 모두의 이슈들이 연루되었을 줄이야! 남녀를 통틀어 패션사에 가장 큰 영향을 미쳤고 여전히 그러한 군복, 트렌치 코트는 그 질긴 생명력만큼이나 많은 사회적, 감정적, 그리고 정신적 문제들을 감싸거나 야기한 수단이자 원인이 되어왔다. 서두에서 언급한바 지구온난화로 더 이상 트렌치 코트를 입지 못할 날이 오는 것은 아닌지 심히 걱정이 된다. 트렌치 코트의, 아니 우리의 미래는 어떻게 되는 걸까?

한국신사 이헌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