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로당에 쌀 줬다' 할아버지 누명에…자손 대대로 낙인"
-
기사 스크랩
-
공유
-
댓글
-
클린뷰
-
프린트
제주 4·3 2세대 유족 현민종씨 인터뷰…재심 청구해 무죄 판결
이승만 기념관 논란엔 "희생자 버젓이 있는데…후세대에 고통" "아버지는 살아생전 제주 4·3에 대해 제게 한 번도 말씀하시지 않았고, 후회되지만 저도 여쭙지 않았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아버지가 평상시 술을 많이 드신 건 억울하게 돌아가신 부친과 행방불명된 형제들에 대한 그리움 때문이었던 것 같아요.
"
제주 4·3 희생자 '2세대 유족'에 해당하는 현민종(61)씨는 사건 제76주기를 앞둔 31일 연합뉴스 인터뷰에서 "아버지 홀로 그 트라우마를 어떻게 견뎠을지 가늠조차 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현씨의 부친은 12살 때 제주 4·3 사건으로 아버지와 형제 네 명을 잃었다.
정부가 2003년 발간한 '제주 4·3 사건 진상조사 보고서'에 따르면 이 사건은 1947년 제주도 삼일절 기념대회 당시 경찰의 발포사건 때부터 1954년 9월 21일 한라산 통행금지령이 해제될 때까지 7년 7개월간 군경의 진압 등 소요 사태 와중에 양민들이 희생된 사건이다.
1948년 4월 3일 발생한 대규모 소요 사태에서 명칭이 유래됐다.
7년여 기간에 적게는 1만4천명, 많게는 3만명이 희생당한 것으로 잠정 보고됐다.
한국 현대사에서 한국전쟁 다음으로 인명 피해가 많은 사건으로 꼽힌다.
현씨의 조부는 1950년 1월 싸늘한 주검으로 발견됐다.
그의 나이 50세, 영문도 모른 채 경찰에 끌려간 뒤 고문을 당하다가 국가보안법 위반·내란음모·내란방조죄 혐의로 징역 2년형을 선고받은 지 열흘 만이었다.
슬하 7남매 중 현씨의 큰아버지를 비롯해 총 4명은 이 시기 행방불명됐다.
현씨 부친으로서는 4·3으로 일가족 대부분을 잃은 셈이다.
현씨는 아버지가 돌아가실 때까지 이런 비극적인 가족사를 단 한 번도 직접 들은 적이 없다고 한다.
아버지 사후 30년도 더 지나서야 친척 어르신들을 통해 비로소 전말을 알게 됐다.
그는 이후 2020년 11월 국회 앞에서 4·3특별법 개정 촉구 1인시위를 한 것을 계기로 명실상부 '4·3 활동가'가 됐다.
2021년에는 제주4·3범국민위원회 회원이 됐고, 다음 달 6일에는 4·3 서울기념식 개최를 맞아 4·3문학회지에 자기 경험을 담은 회고록을 기고할 예정이다.
현씨 가족을 비롯한 희생자와 그 유족은 국가 폭력의 엄연한 피해자였지만, '빨갱이' 꼬리표가 계속 따라붙으며 발목을 잡았다.
무고한 희생이 당대에 그치지 않고 유족에게 대물림된 것이다.
군 제대 후 철도청에서 일했던 현씨 부친은 '제주도 출신은 빨갱이'라는 낙인과 함께 그의 선친이 내란죄를 저지른 것으로 직장에 알려지면서 승진에서 거듭 누락됐다고 한다.
결국 아버지가 직장을 그만둔 뒤에는 어머니가 장사하며 어렵게 생계를 꾸려갔다.
진상 규명과 희생자·유족의 명예 회복을 위한 제주 4·3 특별법은 2000년 국회를 통과했고, 2021년에는 특별법 전부 개정을 통해 피해자들에게 배상하고 재심 청구 기회를 줄 수 있게 됐다.
현씨 조부와 백부(큰아버지)는 70여년이 지난 뒤에야 현씨의 재심 청구를 통해 무죄 판결을 받았다.
현씨는 "서울에 살면서 제주도청, 법원, 변호사 사무실을 뛰어다니는 게 쉽지는 않았지만, 명예 회복을 위해 나섰다"고 말했다.
그는 국가기록원을 통해 받은 당시 판결문, 형무소 수감 기록을 하나씩 짚어 보이며 "'남로당(남조선노동당)에 쌀을 줬다, 돈을 댔다'는 혐의를 갖다 붙여서 누명을 씌웠던 것"이라고 설명했다.
현씨는 그동안 이 사건과 관련해 여러 진전이 있었다면서도 진영 논리에 휩싸여 사건의 본질이 가려지는 것에 대해서는 우려를 표했다.
그는 "시간이 지나면서 이 사건이 또 다른 모습으로 변하고, 다른 이야기로 덮이면서 한국 현대사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줄어들 수도 있다"며 "무엇보다 중앙정부가 4·3을 이념화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그는 양민 학살 당시 국가원수였던 이승만 전 대통령의 기념관 건립 움직임, 영화 건국전쟁 논란 등에 대해 "인간적으로 그건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라며 말을 잇지 못했다.
그는 "학살 희생자 유족이 버젓이 있는데 나라가 나서서 수도에 이승만 기념관을 만들고, 정치인들이 이승만 미화 영화를 보러 다니는 것은 후세대에 고통을 주는 일"이라며 분통을 터뜨렸다.
현씨는 지난해 조부의 산소에 가서 "할아버님의 명예가 조금이나마 회복돼서 다행입니다.
이제 편안하게 잠들기를 바랍니다"라고 알렸다고 한다.
남은 생을 4·3 활동가로 살아가겠다는 그는 "70년 동안 한국 정부가 4·3 사건을 감추고 왜곡해왔다.
앞으로 사건의 진상규명, 전국화, 세계화를 위해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연합뉴스
이승만 기념관 논란엔 "희생자 버젓이 있는데…후세대에 고통" "아버지는 살아생전 제주 4·3에 대해 제게 한 번도 말씀하시지 않았고, 후회되지만 저도 여쭙지 않았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아버지가 평상시 술을 많이 드신 건 억울하게 돌아가신 부친과 행방불명된 형제들에 대한 그리움 때문이었던 것 같아요.
"
제주 4·3 희생자 '2세대 유족'에 해당하는 현민종(61)씨는 사건 제76주기를 앞둔 31일 연합뉴스 인터뷰에서 "아버지 홀로 그 트라우마를 어떻게 견뎠을지 가늠조차 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현씨의 부친은 12살 때 제주 4·3 사건으로 아버지와 형제 네 명을 잃었다.
정부가 2003년 발간한 '제주 4·3 사건 진상조사 보고서'에 따르면 이 사건은 1947년 제주도 삼일절 기념대회 당시 경찰의 발포사건 때부터 1954년 9월 21일 한라산 통행금지령이 해제될 때까지 7년 7개월간 군경의 진압 등 소요 사태 와중에 양민들이 희생된 사건이다.
1948년 4월 3일 발생한 대규모 소요 사태에서 명칭이 유래됐다.
7년여 기간에 적게는 1만4천명, 많게는 3만명이 희생당한 것으로 잠정 보고됐다.
한국 현대사에서 한국전쟁 다음으로 인명 피해가 많은 사건으로 꼽힌다.
현씨의 조부는 1950년 1월 싸늘한 주검으로 발견됐다.
그의 나이 50세, 영문도 모른 채 경찰에 끌려간 뒤 고문을 당하다가 국가보안법 위반·내란음모·내란방조죄 혐의로 징역 2년형을 선고받은 지 열흘 만이었다.
슬하 7남매 중 현씨의 큰아버지를 비롯해 총 4명은 이 시기 행방불명됐다.
현씨 부친으로서는 4·3으로 일가족 대부분을 잃은 셈이다.
현씨는 아버지가 돌아가실 때까지 이런 비극적인 가족사를 단 한 번도 직접 들은 적이 없다고 한다.
아버지 사후 30년도 더 지나서야 친척 어르신들을 통해 비로소 전말을 알게 됐다.
그는 이후 2020년 11월 국회 앞에서 4·3특별법 개정 촉구 1인시위를 한 것을 계기로 명실상부 '4·3 활동가'가 됐다.
2021년에는 제주4·3범국민위원회 회원이 됐고, 다음 달 6일에는 4·3 서울기념식 개최를 맞아 4·3문학회지에 자기 경험을 담은 회고록을 기고할 예정이다.
현씨 가족을 비롯한 희생자와 그 유족은 국가 폭력의 엄연한 피해자였지만, '빨갱이' 꼬리표가 계속 따라붙으며 발목을 잡았다.
무고한 희생이 당대에 그치지 않고 유족에게 대물림된 것이다.
군 제대 후 철도청에서 일했던 현씨 부친은 '제주도 출신은 빨갱이'라는 낙인과 함께 그의 선친이 내란죄를 저지른 것으로 직장에 알려지면서 승진에서 거듭 누락됐다고 한다.
결국 아버지가 직장을 그만둔 뒤에는 어머니가 장사하며 어렵게 생계를 꾸려갔다.
진상 규명과 희생자·유족의 명예 회복을 위한 제주 4·3 특별법은 2000년 국회를 통과했고, 2021년에는 특별법 전부 개정을 통해 피해자들에게 배상하고 재심 청구 기회를 줄 수 있게 됐다.
현씨 조부와 백부(큰아버지)는 70여년이 지난 뒤에야 현씨의 재심 청구를 통해 무죄 판결을 받았다.
현씨는 "서울에 살면서 제주도청, 법원, 변호사 사무실을 뛰어다니는 게 쉽지는 않았지만, 명예 회복을 위해 나섰다"고 말했다.
그는 국가기록원을 통해 받은 당시 판결문, 형무소 수감 기록을 하나씩 짚어 보이며 "'남로당(남조선노동당)에 쌀을 줬다, 돈을 댔다'는 혐의를 갖다 붙여서 누명을 씌웠던 것"이라고 설명했다.
현씨는 그동안 이 사건과 관련해 여러 진전이 있었다면서도 진영 논리에 휩싸여 사건의 본질이 가려지는 것에 대해서는 우려를 표했다.
그는 "시간이 지나면서 이 사건이 또 다른 모습으로 변하고, 다른 이야기로 덮이면서 한국 현대사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줄어들 수도 있다"며 "무엇보다 중앙정부가 4·3을 이념화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그는 양민 학살 당시 국가원수였던 이승만 전 대통령의 기념관 건립 움직임, 영화 건국전쟁 논란 등에 대해 "인간적으로 그건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라며 말을 잇지 못했다.
그는 "학살 희생자 유족이 버젓이 있는데 나라가 나서서 수도에 이승만 기념관을 만들고, 정치인들이 이승만 미화 영화를 보러 다니는 것은 후세대에 고통을 주는 일"이라며 분통을 터뜨렸다.
현씨는 지난해 조부의 산소에 가서 "할아버님의 명예가 조금이나마 회복돼서 다행입니다.
이제 편안하게 잠들기를 바랍니다"라고 알렸다고 한다.
남은 생을 4·3 활동가로 살아가겠다는 그는 "70년 동안 한국 정부가 4·3 사건을 감추고 왜곡해왔다.
앞으로 사건의 진상규명, 전국화, 세계화를 위해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