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김범준 기자
사진=김범준 기자
근로시간 내내 녹음기를 켜놓고 회사 동료들을 모욕·폭언한 직원이 경고를 받자, 되레 "인격권을 침해당했다"며 천만원의 손해배상 소송을 거는 일이 벌어졌다. 녹음 파일을 제출하라고 요구하고 징계절차에 회부한 게 모멸감을 줬다는 주장이다.

전문가들은 회사 분위기를 흐리면서 상시 녹음하는 등 권리를 과도하게 주장하는 직원에 대해서는 끌려다니기 보다 위법성을 확실히 인지시키고 강경 대응해야 한다고 조언한다.

○"하나만 걸려라. 계속 녹음 중"...도 넘은 막말에 동료들도 퇴사

2022년 2월 온라인 생활용품 판매회사에 입사한 A는 입사초부터 다른 직원들과 제대로 소통하지 못하고 갈등이 잦았다.

특히 근무시간에 다른 직원들의 대화 내용을 계속 몰래 녹음하는 습관이 있었다. 또 같이 근무하던 동료 B와 합이 잘 맞아 회사 대표 K를 비롯한 상급자나 직원들을 험담하고 사소한 사실을 근거로 "K대표와 다른 직원들이 우리를 괴롭힌다"고 말하고 다녔다.

A의 언행은 점점 도를 넘어서기 시작했다. A는 B와 대화하면서 "직장 내 괴롭힘 및 협박으로 고소하기 위해 정신과에 다녀왔다" "대표가 정신 못 차리니 (소송을 제기해서) 돈이 엄청 깨지게 해야겠다" "진짜 죽여버리고 분리수거를 해버릴 거고 이를 위해 증거를 모으고 있다"는 발언을 공공연히 했다.

둘이 함께 있으면서 이런 행태는 더 심해졌다. "녹음을 따내기 위해 작전 중이고 계속 따드리겠다" "제대로 하나 걸리기만 해봐라. 계속 녹음 중이다." "진짜 싹 다 건다. 전 잃을 게 없다" "모 주임이 B님이랑 말 섞지 말라는 녹음이 있다. 이XX 조져야겠다" "감옥에 보내 복수하겠다" "아파트 매매만 되면 바로 고소장 접수한다"는 대화도 나눴다.

직장 분위기가 계속 흐려졌고 상당수의 직원이 대표에게 이 둘의 행태를 항의하고 나섰다. 일부 직원은 A의 계속적인 녹음에 질려 퇴사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K대표는 2022년 6월 경 A를 불러 "B와의 대화를 녹음한 파일을 제출하고 더 이상 그런 행동을 하지 말라"고 지시했다. 또 A의 시말서만 제출 받고 사건을 무마하려 했다.

하지만 A는 같은 해 9월 또 갑자기 퇴사를 통보했고 이후 자신의 패기로운 호언장담을 현실화하기 시작했다.

법원에 K대표를 상대로 불법행위를 이유로 1000만원의 위자료를 달라는 손해배상 소송을 건 것이다. A는 재판 과정에서 "K대표가 대화 녹음 파일을 내놓으라고 강요했고 이에 불응하자 'B의 통신비밀보호법위반 범죄를 방조하고 있다'며 '2000만 원 배상해볼래'라고 겁을 주는 등 폭언·협박을 했다"고 주장했다.

이어 "(A와 B가 함께) 타인에 대해 험담과 욕설을 하는 내용의 대화 파일을 제3자가 있는 징계위원회에서 공개해 수치심을 느끼게 했다"며 "다른 직원에게도 'A가 정신에 이상이 있다'고 말해 나의 사회적 인격을 침해했다"고 주장했다.

○법원조차 "일반적 관리자는 참기 어려울 정도"...혀 끌끌

재판을 맡은 서울중앙지방법원은 지난해 9월 A의 주장을 일축하고 K대표의 손을 들어줬다. 재판부는 "K대표가 녹음한 파일을 내놓으라고 요구한 사실은 인정된다"면서도 "이는 대화를 몰래 녹음해 다른 직원들과 갈등을 빚게 되자, 관리자 입장에서 해결하기 위해 요구한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어 "A와 대표 사이에 오간 대화 내용을 보면, A도 일방적으로 요구당하기만 한 게 아니라 대표의 요구를 하나하나 반박했다"며 "대표는 A의 비합리적인 대응 탓에 일반적인 관리자라면 참기 어려울 정도의 심리적 상황에서도 이를 끝까지 참으며 대화를 계속했다"고 지적했다.

이를 바탕으로 "K대표의 행위는 불법행위에 이를 정도로 위법하다고 볼 수 없다"고 판단했다.

대화 파일을 징계위원회에서 공개했거나 "정신이 이상하다"고 말했다는 주장에 대해서도 "그랬다는 증거가 부족하고, 설령 그랬어도 징계위원회의 역할이나 앞서 본 A의 행위에 비춰 보면 그런 행위가 위법하거나 인격권을 침해했다고 볼 수 없다"고 꼬집고 A의 모든 청구를 이유없다고 기각했다.
사진=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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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시 녹음기 켜놓는 직원, 놔둬도 될까

최근 근로자들의 분쟁이 법적 문제화 되는 일이 부쩍 늘어나면서 녹음을 둘러싼 이슈도 점점 많아지고 있다. 다만 원칙적으로 통신비밀보호법 3조 1항에 의하면 누구든지 ‘공개되지 아니한 타인 간의 대화’를 녹음 또는 청취하지 못한다.

문제는 타인 간의 대화를 들을 수 있는 '가청거리'에서 녹음을 한 경우다. 이 경우 특히 해당 대화가 '공개되지 않은' 타인 간의 대화인지도 쟁점이다. "나는 그냥 녹음기를 켜 놓고 있었을 뿐이고 내 근처에서 상대방이 대화를 했기때문에 자연스럽게 녹음이 된 것이므로 위법하지 않다"는 주장을 펼치는 경우가 적지 않다.

다만 법원은 공개되지 않은 타인 간 대화의 범위를 점점 넓게 해석하고 있다. 최근 하급심 판결에서는 회사 동료들이 나누는 사담은 '공개되지 않은 타인 간의 대화'라고 판단될 가능성이 높다는 게 전문가들의 견해다.

실제로 의정부지법은 지난해 4월 한 공무원이 사무실에서 팀장과 방문자 간 나누는 대화를 녹음한 사안에서 ‘공개되지 않은 타인 간의 대화’를 녹음했다고 판단한 바 있다.

최근 대법원도 아동학대처벌법 위반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초등학교 교사 사건에서도 "피해 아동의 부모가 (아동의 가방 등에 녹음기를 숨겨) 몰래 녹음한 교사의 수업 시간 중 발언은 '공개되지 않은 대화'"라며 녹음 파일의 증거능력을 부정했다.

그밖에 자신의 회사 컴퓨터에 달린 마이크를 연결해 자신의 부재 중 대화를 녹음한 행위에 대해서도 "장기간 무작위하게 이뤄진 녹음은 직장 동료 간 불신을 초래하고 상시 불안을 갖게 하며, 일상에서 자기 검열에 이르게 해 사생활의 비밀과 자유, 표현의 자유를 심각하게 침해한다"며 징계 사유라고 본 판결도 눈에 띈다.

김동욱 법무법인 세종 변호사는 "법원의 입장에 따르면 녹음기를 항상 켜놓고 있어서 자연스럽게 녹음이 된 것이라든지 등의 변명은 안통한다"며 "회사에서 녹음이 횡행하는 것은 절대로 정상적인 상황은 아닌만큼, 인사노무 담당자들은 녹음의 정당성에 대해 정확히 인지하고 단호하게 대응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곽용희 기자 ky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