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를 방문한 다음 해부터 고흐는 유화로 여러 장의 자화상을 그렸다. 풍경화에서는 볼 수 없는 특별한 점이 보인다. 총 서른여섯 점의 자화상 중 오늘 보게 되는 이 작품은 '밀짚모자를 쓴 고흐의 자화상'으로 알려져 왔다. 파리에서 그려졌으며 밀짚모자와 불그스름한 머리, 파란 배경에 파란 정장 상의, 하늘색의 빳빳한 나비넥타이를 한 신사가 있다. 그런데 오랫동안 이 그림이 테오의 초상화인지 아니면 고흐의 자화상인지에 대한 논쟁이 뜨거웠다.

공식적으로 2011년 이후부터는 ‘고흐의 자화상 또는 테오의 초상화(Self-Portrait or Portrait of Theo van Gogh)’라는 두 개의 제목을 갖게 되었다. 고흐 형제는 성격은 달랐지만 외모는 매우 닮았다. 더욱이 두 형제 모두 삶에 서려 있는 슬픈 녹색 눈을 지니고 있어, 이 점이 그림 속 인물이 고흐인지 테오인지 그 정체성을 더욱 모호하게 했다.
고흐의 자화상 또는 테오의 초상화(1887년)
고흐의 자화상 또는 테오의 초상화(1887년)

형제들의 ‘모방 욕망’

1886년 2월 말에 시작한 두 형제의 동거는 1888년 2월 고흐가 갑자기 파리를 떠남으로써 끝을 맺었다. 고흐가 파리를 떠난 이유에 대한 정확한 기록이 아직은 없지만, 2년간 파리에서의 다양한 사건들에서 그 단서를 찾을 수 있다. 이 중 하나는 전시회를 둘러싼 석연치 않은 형제 관계다.

이번 글에서는 형제 관계를 20세기 프랑스 문학평론가 르네 지라르(René Girard)의 ‘짝패(double)’ 개념으로 살필 것이다. ‘짝패’란 서로를 모방하고 경쟁하는 두 사람을 말한다. 이들은 서로를 부러워하고 모방하다가도 상대방을 제외시키고 희생시키는 이중적 감정을 가진다. 그 과정에서 갈등의 골이 깊어진다. 고흐 형제간에도 그런 갈등이 있었다.

지라르의 이론에 따르면, 사람은 진정 자신이 원하는 것을 욕망하는 대신 '짝패'라 여기는 상대가 가진 것에 대해 ‘모방 욕망(mimetic desire)’을 갖는다. 특히 자신과 아무 상관도 없는 분야의 능력을 부러워하면서 상대를 향한 시기와 질투, 분노, 모함을 동반한다. 고흐와 테오의 경우에도 테오는 고흐의 예술적 재능과 열정을 욕망하고, 고흐 또한 테오가 가진 사회적 지위와 안정적인 직업을 욕망했다.

하지만 상대를 향한 부러움이 크면 클수록 자신이 그런 능력이 없다는 사실 때문에 열등감이 작동하면서 끝내 상대를 제거하고 자신이 그 능력을 차지하려고 한다. 동생 테오는 고흐의 재능을 통해 성공하는가 싶더니 형이 자신의 영역에 들어오는 것을 철저히 경계했다. 그래서 테오가 욕망했던 고흐의 예술적 재능이 무엇인지, 또한 고흐는 테오의 어떤 점을 부러워했는지를 살펴본다면 고흐가 갑작스럽게 파리를 떠난 이유를 이해할 수 있다.

고흐가 파리에 머물던 시기에 테오는 구필 화랑에서 중요한 위치에 있었다. 회사는 새로운 화가를 발굴하기 위한 계획을 세우고 있었고, 마침 책임자 중 한 명이 은퇴하게 되면서 테오가 책임자가 되었다. 그는 다양한 작가들의 작품을 전시할 수 있는 공간으로 화랑을 만들고 싶었다. 전통적인 작품부터 현대적인 작품까지, 그러니까 고전주의, 사실주의 작가들부터 인상파와 젊은 후기 인상파 작가들의 작품까지 전시하였다. 그런 중에도 상사들을 의식해 1층에는 전통적인 작품을, 2층에는 현대적인 작품을 전시했다.

하지만 테오는 미술과 화가들의 동향을 파악하는 데 어려움이 많았다. 이는 그들이 매우 다양하며 거의 매일 전시회를 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테오에게는 고흐의 예리한 시각과 방대한 지식, 그리고 작품에 대한 생생한 묘사가 절실했다. 특히 고흐는 테오가 신진 작품들을 선별하는 데에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 그 결과로 얻게 된 모네 그림에 대한 테오의 성공은 미술계에 현저한 영향을 미쳤으며 경제적 이익도 상당했다. 당시 테오는 여동생에게 “2년 전 형이 처음 이곳에 왔을 때는 우리 사이가 이렇게 가까워질 줄 몰랐어.”라는 말로 형 덕분에 얻은 성공은 감추고 친밀감만을 과시했다.

‘모방 욕망’에 따른 양가적 감정

고흐와 테오는 함께 여러 화가들의 작품을 모아 전시회를 열었다. ‘그랑부이용 레스토랑 뒤 샬레’라는 곳에서 열린 전시회에는 에밀 베르나르와 툴루즈 로트레크의 작품도 있었다. 조르주 쇠라와 폴 고갱도 이 전시회를 보러 왔고, 테오는 고갱의 작품 몇 개를 팔 기회도 얻었다. 그 후에도 고흐와 테오는 다른 화가들의 작품들을 모아 전시회를 계획했다. 전시회가 끝나면 몽마르트 근처 카페에서 다른 화가 친구들과 함께 저녁을 먹으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이때가 고흐의 전체 인생 중에 가장 활기찬 시기였다.

테오는 단박에 파리 미술계에서 큰 권력을 누리며 많은 화가들에게 존경을 받았다. 화가들은 자신들의 작품이 구필 화랑에 전시되는 것만으로도 큰 영광으로 여겼고, 그 대가로 작품들을 테오에게 헐값으로 팔거나 선물로 주는 일도 많았다. 테오의 작업실을 부지런히 들락거리며 그의 조언을 구하고, 서로들 예술적 영감을 나누었기에 늘 많은 사람들로 부쩍거렸다. 이런 테오의 사회적 지위를 가장 부러워한 사람은 고흐였다. 하지만 동생을 흉내 내면서부터 비극이 시작되었다.

고흐는 테오와 같은 길을 걸으면서 한마음이 되었고 자신도 성공하리라 확신했다. 같은 시기에 그려진 이 자화상(1887년)을 보면, 그림 속 고흐는 중절모자를 쓰고 실크 스카프를 두른 근사한 정장 차림이다. 고흐의 자화상들이 주로 낡은 작업복을 입고 치아가 상해서 두 뺨은 푹 꺼져 있으며 시선은 창백하고 멍하고 냉담한 모습이 대부분임에 반해, 이 그림은 마치 자신이 테오인 듯 말쑥한 사업가의 모습이기에 낯설기까지 하다.
자화상(1887년)
자화상(1887년)
만약 앞에서 언급한 자화상을 테오의 초상화라 친다면, 테오는 밀짚모자를, 고흐는 중절모를 쓴 것이다. 우연히도 고흐의 그림은 두 형제 관계의 ‘모방 욕망’을 여실히 보여준다. 고흐가 파리에서 겪은 변화에 대해서는 다양한 의견이 있지만, 그중에서도 정장을 입기 시작했다는 것은 그의 심리적 변화를 보여주는 중요한 요소다.

1887년 10월, 고흐는 자신의 모든 열정과 노력을 쏟아 첫 번째 전시회를 기획했다. 새로운 화파를 대표하는 전시회로 준비하고자 했다. 우선 예술적으로, 다음은 상업적으로 성공할 것이라 믿으며 자신의 예술성도 인정받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 여겼다. 하지만 전시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이 전시회를 구필 화랑에서 열 수 없게 되었다. 테오가 상사들을 핑계로 거부했기 때문이다. 결국 이 전시회는 작은 규모로 알려졌고 참여 작가가 없어서 50여 점의 고흐 작품만으로 채워졌다. 전시회는 며칠 만에 실패로 끝났다.

급기야 고흐의 ‘모방 욕망’은 걷잡을 수 없는 비난과 분노의 감정으로 바뀌었다. 고흐는 구필 화랑에 발길을 끊었고, 화랑과 미술 시장의 부패에 대해 비난하면서 테오와 자주 말다툼을 벌였다. 반면 테오는 감정의 변화가 심하고 격정적인 형을 더 이상 감당하기 어렵게 되자 형에게 계속 지원하기가 싫어졌다.

그 후 테오는 예술성보다는 상업적인 성공을 거둘 수 있는 그림에 더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색채가 풍부하고 힘이 넘치는 그림, 주제가 유쾌하고 눈을 만족시키는 그림을 좋은 작품이라 여겼다. 이런 기준은 고흐가 오랫동안 싫어했던 것이었다. 하지만 테오는 형에게 보란 듯이 그런 그림들로 돈을 벌었다. 그는 자신의 선택이 옳다고 믿으며, 형의 예술적 가치관과는 다른 길을 걸었다.
1887년 파리에서 그린 다른 자화상들
1887년 파리에서 그린 다른 자화상들
한편 고흐는 동생처럼 사업가가 되기로 결심했었지만 동생의 소극적 태도와 상업성에 몹시 슬퍼했다. 또한 자신의 사업성과 예술성이 인정받지 못하는 현실에 좌절했다. 하필 그때 엄마와 동생들에게 두었던 자신의 작품들과 그림 도구들이 경매에 넘겨졌다는 소식까지 들렸다. 이에 그는 자신의 불운과 불행의 원인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하며, 하루하루를 압생트라는 술로 잊으려 했다.

이들 형제가 아직 엄마 품에 있던 때, 테오는 엄마에게 안겨 젖을 먹고 있었다. 그것을 본 네 살 많은 형은 젖을 먹듯 입을 삐죽이며 울음을 터뜨렸다. 동생은 파랗게 질려 형이 어머니의 젖을 먹지 못하게 손을 내둘렀다. 젖을 두고 경쟁하는 유아들처럼 두 형제가 서로를 향해 갖고 있었던 ‘모방 욕망’은 서로의 재능을 부러워하면서도 경쟁심을 느끼게 했다. 이러한 경쟁심은 때로는 상대를 희생시키기까지 한다. 상대를 향한 분노와 증오는, 상대의 재능을 따라갈 수 없는 초라한 자신의 모습에서 비롯된다.

“제발 나에게 해를 끼치지 말아줘.” 테오가 고흐에게 반복했던 부탁이다. 1887년에서 1888년으로 넘어가는 겨울에 고흐는 동생과의 갈등을 해결하려 노력했지만 상황은 점점 더 심각해졌다. 테오는 형과 따로 살기를 간청했고, 고흐는 그동안 동생에게 퍼부었던 비난과 분노에 죄책감을 느끼고 급기야 파리를 떠났다.

돈에 집착하기는 싫지만 돈을 벌고 싶은 욕망, 상업적 그림이 싫지만 사교계에서 멋지게 활동하는 테오를 부러워하던 고흐는 어설프게 테오를 따라 했던 것이다. 그러다 정신을 차린 후 동생 테오의 성과를 남겨둔 채 자신만의 새로운 공동체를 만들고자 파리를 떠났다. 고흐가 떠나지 않았더라면 또 하나의 ‘형제의 난’을 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2년 후 고흐는 사망하기 직전에, 자세한 설명은 없었지만 자신이 파리를 떠난 것은 잘한 일이라고 밝혔다.

테오는 형의 장례식을 치른 후 6개월 만에 죽었다. 형이 더 오래 살았다면 동생도 더 오래 살았을 것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형제가 잘되기를 바라는 마음 한구석에 또 부러움과 속상함이 같이 존재하는 이런 슬픈 형제애가 우리 삶에 얼마나 많을까? 어찌 보면 사랑과 증오의 양가적 감정은 오늘날 우리에게 놓인 운명 같은 것이다.
1887년 파리에서 그린 다른 자화상
1887년 파리에서 그린 다른 자화상
만약에 부럽기도 하고 밉기도 한 그 사람이 있다면, 짝패가 되어도 좋으니 그런 양가적 감정을 솔직히 인정하면 어떨까? 형제가 나를 떠나기 전에 터놓고 말해 볼 수 있는 용기가 더 큰 형제애로 나아갈 기회를 선사하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