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명의 의사에게라도 면허 관련 불이익이 가해진다면 의사에 대한 정면도전으로 간주하겠다”, “의사를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한 것 자체가 어이없을 정도로 어리석은 발상이다”….최근 1주일 새 전·현직 의사단체 임원들이 국민과 정부를 향해 쏟아낸 발언이다. 의대 정원 확대에 반대하는 젊은 의사인 전공의와 예비 의사인 의대생들의 집단행동이 본격화하자 중장년 의사들을 중심으로 이들을 선동하는 발언이 쏟아지고 있다.의료계의 과격 발언은 18일에도 이어졌다. 대한의사협회는 이날 대국민 담화를 발표한 한덕수 국무총리를 향한 성명에서 “(정부가) 부탁을 가장한 겁박을 했다” “돌이킬 수 없는 의료 대재앙을 맞이할 것이다” 등의 격한 반응을 쏟아냈다. 이들은 “정부가 의사를 악마화하면서 마녀사냥을 하고 있다”며 “국무총리의 대국민 담화문 발표는 의사들의 자율적인 행동을 억압하기 위한 명분 쌓기에 불과하다”고 강한 유감을 나타냈다.지난 15일 서울시의사회가 용산 대통령실 인근에서 개최한 ‘의대 증원·필수의료 패키지 저지를 위한 궐기대회’에서 자신을 레지던트 1년차라고 밝힌 한 참가자는 “의사가 환자를 두고 병원을 어떻게 떠나느냐 하시겠지만, 제가 없으면 환자도 없고, 당장 저를 지켜내는 것도 선량함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정부와 시민단체들이 ‘환자 없이는 의사가 없다’며 의사 집단행동을 만류하자 이를 비꼰 것이다. 앞서 의사들은 “지방에 부족한 건 의사가 아니라 민도” 등의 격한 발언을 여과없이 쏟아냈다. 국민 80%가 의대 정원 확대에 지지를 보내는 것과는 대조적이다.의사들이 이처럼 국민이나 정부는 아랑곳하지 않는 태도를 보이는 것은 20여 년간의 ‘학습 효과’에서 비롯됐다는 분석이 나온다. 의사들에게 불리한 정책이 추진될 때마다 환자를 볼모로 정부와 싸워 매번 ‘포기각서’를 받아내는 데 성공했기 때문이다.이지현/이영애 기자 bluesky@hankyung.com
전공의 집단행동에 따른 의료현장 혼란이 가시화하고 있다. 수술에 이어 진료 일정마저 연기되자 환자들은 불안감을 호소하고 있다.18일 한 정신질환 환자 커뮤니티에는 전공의 집단행동으로 진료가 약 4개월 이상 연기됐다는 내용의 글이 올라왔다. A씨는 “서울아산병원에서 오는 22일 초진을 받기로 했다”며 “그런데 오늘 전화가 와서 ‘전공의 파업으로 인해 진료가 6월로 연기됐다’고 하더라”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4개월을 기다린 진료였는데 조금 심한 것 같다”며 “파업했다고 4개월을 더 기다리라는 것”이라고 답답함을 토로했다.전공의 집단행동으로 환자의 수술·진료가 잇달아 연기되고 있다. 전공의는 상급종합병원 의사 인력의 30~40%를 차지하고 있다. 교수의 수술과 진료를 보조하고 주치의로서 환자의 상태를 점검한다. 전공의들이 자리를 비우자 각 병원에서는 교수들까지 전공의 업무 및 당직 인력으로 차출하고 있다. 교수들이 담당해온 외래진료 일정마저 연쇄적으로 영향을 받은 것이다.병원들은 우선 응급도와 중증도에 따라 수술 일정을 조정하고 있다. 세브란스병원에서는 마취통증의학과 가동률이 평소 대비 50% 미만으로 운영돼 산모가 출산할 때 고통을 줄여주는 ‘무통주사’를 맞지 못하는 사례도 생겼다.서울대병원 등 ‘빅5’ 병원이 아닌 국립암센터도 ‘수술 연기’ 사례가 이어졌다. 이날 중증 암 환자가 모인 인터넷 카페에는 “19일 국립암센터에서 수술이 예정돼 있었으나 수술에 참여하기로 한 서울대 전공의들이 파업해 취소됐다”며 “당장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난감하다”는 글이 올라왔다.오현아 기자 5hyun@hankyung.com
인턴 레지던트 등 대학병원 전공의들의 의료 현장 이탈이 본격화하면서 4년 만에 또다시 의사 집단행동이 시작됐다. 2000년 의약분업 사태 후 의사들의 집단행동 주기가 짧아지는 추세다. 의사들은 2014년과 2020년에도 파업을 통해 의사-환자 간 원격의료와 의대 정원 확대 정책을 무산시켰다. 전문가들은 이번에도 정부가 의료개혁에 실패하면 ‘다음 기회는 없을 것’이라고 진단했다. 대한의사협회 비상대책위원회는 “정부가 의대생과 전공의의 행동을 처벌하려고 하면 돌이킬 수 없는 의료 대재앙을 맞이할 것”이라고 18일 밝혔다. 정부가 의사 집단행동에 ‘강경 대응’하겠다는 방침을 밝히자 ‘의료 시스템을 무너뜨리겠다’는 태도로 응수한 것이다. 의협은 오는 25일 전국 각지에서 규탄대회를 열고 이른 시일 안에 대규모 집회를 개최할 계획이다. 정부는 16일 기준 전국 23개 의료기관에서 715명의 전공의가 사직서를 제출했다고 밝혔다.의사들은 2014년과 2020년에도 대규모 파업에 나섰다. 비대면 진료 도입, 의대 정원 확대 등 의료개혁에 반대하기 위해서였다. 당시 집권 여당은 달랐지만 모든 정부가 백기를 들었다. 정부가 국민 생명권이 훼손되는 상황을 버텨낼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의사 파업으로 대학병원이 가동을 줄이자 중증 환자가 치료받을 병원을 찾다가 숨지는 사고가 발생했고, 이후 정부가 합의에 나서는 역사가 반복됐다. 전·현직 의사단체장들이 ‘정부는 의사를 이길 수 없다’며 연일 강경 발언을 이어가는 데도 이런 역사적 배경이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의사 반대에 막혀 의료개혁이 미뤄지는 동안 국내 의료 시스템은 ‘티핑포인트(한계점)’에 도달했다는 게 전문가들의 평가다. 필수진료 분야 의사가 부족해 마취과 응급의학과 등의 24시간 당직 시스템이 무너지고 전공의·교수들이 격무를 호소하는 게 ‘개혁이 필요하다는 메시지’란 것이다. 김윤 서울대 의료관리학과 교수는 “의사협회는 20년간 파업하는 방식으로 정부를 무릎 꿇렸다”며 “환자 생명을 볼모로 파업하면 정부 정책쯤은 쉽게 뒤집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게 문제”라고 지적했다.이지현/이영애 기자 bluesk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