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일훈 칼럼] '명품백 논란'보다 중요한 국민 삶의 혁신
윤석열 대통령은 ‘명품백 수수’에 대해 끝내 명시적 사과를 하지 않았다. 부정적 여론이 강하고 총선에 악재로 작용할 것이 뻔한 데도 그랬다. 목에 칼이 들어와도 처음부터 불순한 의도로 접근한 세력들의 불의에 굴복할 수 없다는 고집이었을 것이다. KBS 방송 직후 지난 8일 열린 민생토론회. 신분을 속인 청소년들에게 술을 팔았다가 그들의 신고로 영업정지 위기를 맞은 음식점주의 하소연이 있었다. “나쁜 짓을 한 사람은 따로 있는데 왜 제가 온전히 그 피해를 감당해야 합니까.”

관련 부처에 즉각 시정을 지시한 윤 대통령도 흥분했다. “술 먹고 담배 산 청소년이 자진신고한 경우는 처벌해서는 안 될 것 같습니다. 국가가 이렇게 하는 건 심각한 문제입니다…먹고 살기도 힘든데 도대체 왜 그러느냐 이 말이야.” 이 장면이 묘하게도 명품백 논란에 대한 대통령의 울화를 엿보게 만들었다. “잘못한 사람은 따로 있는데, 도대체 왜 그러느냐”로 오버랩됐다.

윤 대통령은 부산엑스포 유치 실패에 대해선 “모든 것이 내 책임”이라고 바로 사과했다. 그 한마디로 마무리됐다. 김건희 여사 문제 역시 깔끔하게 사과했더라면 후폭풍은 없었을 것이다. 대통령이라고 정치적 유불리를 따져보지 않았을 리 없다. 혹여 총선에서 패배한다면 모든 비난을 감수해야 할 판이다. 그래도 고개를 숙이지 않았다. 그 책임은 오롯이 본인의 것이며 판단은 국민 몫이다. 김경율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은 “이제 총선 때까지 매를 맞으면서 가야죠”라고 꼬집었다. 대통령에 대한 원념이 가득했다.

대통령은 점차 여의도에서 밀려나고 있다. 용산 출신 후보들도 알아서 긴다. 대통령에게 남은 것은 정책 혁신이다. 정작 국민 삶엔 명품백 이슈보다 몇십 배, 몇백 배 중요한 문제다. 해결하지 못하는 난제가 수두룩하다. 대학 등록금을 올리자고 하면 취약계층의 학자금 부담, 의료관광을 키우자고 하면 영리병원 논란, 늘봄학교는 교사들의 반발이 가로막는다.

이런 장벽들은 자유주의 같은 거대담론으로 돌파하기 어렵다. 국민 불편 해소라는 작은 행정부터 인구·산업구조 변화에 대응해야 한다는 큰 틀의 접근과 노력이 필요하다. 그래야 작은 이해관계를 넘어서는 구성원들의 지지와 공감을 얻을 수 있다. 과거 이건희 삼성 회장이 주창한 ‘1석5조(一石五鳥)’ 경영의 입체적 사고를 참고할 만하다. 이 회장은 1988년 달동네에 탁아소 사업을 지시하면서 ①어린이 성장 지원 ②부모 맞벌이 가능 ③가계소득 증가 ④달동네 탈출 ⑤부의 재분배 등 다섯 가지 효과를 역설한 바 있다.

현실 속에서도 이런 식의 접근이 얼마든지 가능하다. 예를 들어 다양한 근로 형태 도입은 주택과 교통 문제를 해결하는 데 도움이 된다. 디지털 전환을 기반으로 한 재택·원격·선택근무와 시차출퇴근제 확산은 세계적 대세다. 노사가 기업 생산성과 근로자 삶의 질 향상을 전제로 합의한다면 정부가 보조금을 늘려서라도 유연근무제를 적극 장려할 필요가 있다. 광역 교통망 건설과 도시형 서민주택 건설은 시일이 많이 걸려 당장 체감하기가 어렵다. 일하는 방식을 바꾸면 삶의 질이 달라지고 결혼과 출산을 주저하는 사회적 문제들의 민감도를 낮출 수 있다.

농업용지 등 국토 이용에 대한 규제 완화도 경제적 자유 확대, 지역 일자리 창출, 생활인구 증가, 지역소멸 완화 같은 다방면의 효과를 앞세울 수 있다. 실제 지역 내 자발적 논의도 활발하다. 농업 고령화로 세대교체 실패가 명백한 상황에서 농지를 팔지도, 사지도 못하게 하는 것은 농민 재산권 침해다. 정부가 이미 스마트팜 시설에 농지 이용을 제한적으로 허용하겠다는 방침을 밝혔지만 아예 기업들이 직접 농지를 사들여 관련 사업을 할 수 있는 길을 터줘야 한다. 경자유전(耕者有田) 원칙의 발전적 전환이 이뤄져야 농업의 기술 혁신과 지역 성장을 가속화할 수 있다.

윤 대통령은 이번 총선이 끝나면 집권 2기에 들어간다. 벌써부터 레임덕이 시작됐다는 입방아들이 나오지만 일하는 사람에겐 통하지 않을 말이다. 검사로 입신해 국가 지도자가 되기까지 모든 과정이 남달랐던 대통령이다. 위기를 기회로 만드는 특유의 뚝심과 돌파력이 필요한 시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