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칼럼] 사과의 배신
한국인에게 가장 좋아하는 과일을 물어보면 언제나 사과다. 서양인들의 사랑도 크게 다르지 않다. ‘하루 사과 한 개면 의사가 필요 없다’는 속담이 있을 정도다. 백설공주의 사과처럼 친숙한 소품이자 에덴동산의 선악과처럼 종교적 상징물 이기도 하다.

이런 ‘최애 과일’이 요즘 우리네 손길을 거부하고 있다. 값이 너무 올라 ‘가까이 하기엔 너무 먼 당신’이 되고 만 것이다. 통계상 1년 새 57% 올랐다지만, 체감 상승률은 2배를 오르내린다. 설을 거치며 ‘사과의 배신’을 성토하는 여론이 불붙었다. 맘카페엔 “사과 한 개 값이 1만원에 달해 차례상에 못 올렸다” “손이 떨려 장바구니에 담지 못했다”는 사연이 줄을 잇는다.

사과만의 일도 아니다. 다른 과일도 도미노 인상 러시다. 딸기 단감 감귤 복숭아 배는 적게는 50%, 많게는 100% 안팎 치솟았다. 사과 값이 오르면 대체재인 배나 감귤로 수요가 몰리고, 다시 바나나 파인애플 망고 같은 수입과일 값을 밀어올리는 구조다.

어느새 한국은 사과 값이 세계에서 가장 비싼 나라가 됐다. 넘베오(Numbeo)에 따르면 한국의 사과(1㎏) 값은 6.75달러로 세계 1위다. 물가가 높다는 미국(5.35달러) 일본(4.48달러) 스위스(4.27달러)를 멀찌감치 제쳤다. 오렌지 바나나 값도 마찬가지다.

폭등한 과일 값은 나라 경제까지 뒤흔든다. 1월에는 소비자물가를 0.4%포인트나 끌어올렸다. 역대급 파괴력이다. 이상 기후로 인한 작황 부진 탓이라는 게 정부 해명이지만 꼭 그렇지만도 않다. 8년 전(2016년) 통계에도 사과·오렌지 값은 이미 세계 3위다.

후진적 유통구조 등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수입제한 같은 과도한 농가보호 정책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사과와 배는 사실상 수입금지품이다. ‘해외 병해충이 들어올 수 있다’며 강력한 검역제도로 유통을 원천봉쇄한다.

‘지구가 망하더라도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는 말처럼 사과는 희망의 상징이기도 하다. 5000만 명이 비용을 부담해 농민만을 과보호하는 방식은 결코 희망이 될 수 없다. 물가당국의 재점검과 진정성 어린 해명이 있어야 한다.

백광엽 논설위원 kecorep@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