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수첩] 韓정부의 한 장짜리 '배터리 의견서'
미국 관보를 통해 공개된 산업통상자원부의 문서는 한눈에 봐도 실망스러웠다. 직인도 안 찍힌 A4 용지 한 장짜리 문서가 전부였다. 지난 18일 한국 정부가 미국 재무부에 제출한 인플레이션 감축법(IRA) 외국우려단체(FEOC) 규정 관련 의견서라는 것조차 의심스러울 정도로 빈약해 보였다. 한국 정부 의견서는 “전기차 배터리 광물 원산지를 모두 추적하는 게 어렵다는 한국 기업의 입장을 고려해 달라”는 한 문장으로 요약된다.

미국 정부는 갈수록 전기차 보조금 지급 조건을 까다롭게 하고 있다. 2022년 8월 IRA 시행 초기 북미에서 생산된 전기차는 보조금 7500달러를 받았다. 미국 앨라배마 공장에서 조립하는 제네시스 GV70 전기차가 현대자동차그룹 차종 중 유일하게 보조금을 받을 수 있었다. 그러다 작년 4월 미국 정부는 IRA 배터리 부품·광물 요건을 신설했다.

북미에서 조달해야 하는 부품과 광물의 비율을 정한 것이다. GV70 전기차도 보조금 지급 차종에서 제외됐다. 이달부터는 아예 중국 등 4개국을 전기차 배터리 공급망에서 원천적으로 배제하는 FEOC 규정이 새로 시행됐다. 한국 기업들로선 수십조원을 투자해 미국 조지아 등에 대규모 배터리, 자동차 공장을 완공한다고 하더라도 보조금 지급 여부를 장담하지 못하는 상황이다.

현대차와 기아, LG에너지솔루션과 삼성SDI, SK온 등이 미국 재무부에 제출한 의견서를 보면 한국 기업의 절박함을 알 수 있다. 현대차·기아는 6쪽 분량의 대관 담당 임원 직인이 찍혀 있는 의견서를 통해 FEOC가 갖는 현실적 문제점을 조목조목 지적했다.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을 근거로 찾아내며 보조금 지급 비율에 변화를 줄 수 있는 계산식 대안까지 제시했다. 배터리 3사도 흑연 등 주요 광물이 중국에서 거의 대부분 생산되는 현실에 대해 읍소했다. 배터리산업 특성상 광물 원산지를 모두 추적할 수 없다는 점도 짚었다.

기업들의 의견서에 비하면 산업부의 문서는 ‘성의가 없다’는 말이 무색할 정도다. 다른 국가와 유관 단체가 제출한 72개의 의견서를 살펴봐도 한국 정부가 제출한 의견서보다 짧은 의견서는 찾을 수 없었다.

이에 대해 산업부 관계자는 “세밀한 내용을 모두 담는 것이 현실적으로 어려웠다”고 말했다. 국내 기업 간에도 일부 입장 차이가 있어 요구 사안을 모두 쓰기 어려웠다는 것이다. 전기차산업은 국가가 정한 첨단산업 중 하나다. 우리 기업이 짚은 FTA 규정이라도 넣었어야 하지 않나. 같은 말이라도 정부의 요청엔 힘이 실리기 마련이다. 열심히 하고 있다는 산업부 공무원의 해명만 믿고 있기엔 한국의 전기차산업은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