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와 예술의 상관관계는, 때론 지루한 클리셰다. 메디치 가문에서 거트루드 스타인, 페기 구겐하임까지 수백 년에 걸쳐 부를 가진 자들은 어김없이 미술품 수집과 예술가 후원에 열정을 쏟았다. 전설 뒤엔 구설도 따랐다. 단지 부와 명예를 과시하려 했다거나, 비즈니스의 어두운 면을 감추기 위한 이미지 세탁 용도였다는 (역시나 뻔한) 그런 이야기들 말이다.

21세기 예술계가 요구하는 ‘노블리스 오블리주’의 핵심은 ‘왜?’라는 질문에 대한 명확한 답에 있다. 그저 예술을 사랑해서, 혹은 어떤 작가를 순수하게 후원하고 싶어서였다는 대답은 이제 별 감동을 주지 못한다. 역사 속 누군가가 했던 일의 동어반복일 뿐이어서다.
에이드리언 청 K11 회장이 12일 서울 용산구 사무실에서 본지와 인터뷰하고 있다.
에이드리언 청 K11 회장이 12일 서울 용산구 사무실에서 본지와 인터뷰하고 있다.
미술품 수집의 개념을 소유에서 공유로, 예술의 후원 목적을 아티스트 개인이 아닌 일반 대중으로 확장한 이가 있다. 지난 10여년 간 아시아를 넘어 전 세계 예술계에서 ‘큰손 컬렉터’로 떠오른 홍콩의 억만장자 에이드리언 청(Adrian Cheng·45) K11그룹 회장이다. 보유 자산만 289억달러(약 39조원)에 달하는 ‘홍콩 3대 부호’ 청 가문의 3대 후계자인 그가 지난 20년 간 세계 예술계에 끼친 영향력은 ‘부자들의 클리셰’로 치부하기엔 그 규모와 깊이가 넓고 깊다.
현대미술의 대작들을 아시아에 최초로 소개하고, 1000여 명의 아시아 신진·중견 작가들을 후원하는 한편 누구나 일상에서 동시대 예술을 곁에 둘 수 있는 공공의 공간들을 다수 마련했다. 사람들에게 예술적 영감을 줄 수 있는 일이라면 패션과 공예, 미디어 아트 등 장르를 넘나들며 자금을 후원했고, 2000회가 넘는 대규모 전시회를 열었다. 세계의 미술관, 박물관은 물론 패션·디자인 재단과의 네트워크를 다져온 그는 프랑스 정부로부터 홍콩계 중 최연소 문화공로 훈장을 받기도 했다. 지난해엔 글로벌 예술 관련 기관과 갤러리 창업자, 패션 관계자와 큐레이터들을 모아 예술의 담론을 펼치는 ‘The ReStartArt Club’도 만들었다.

그의 끈질긴 예술 여정의 올해 정착지는 한국이다. 15년 넘게 한국을 오가며 ‘한국인의 창의력’에 박수를 보내온 그는 ‘K11그룹 한국 법인’을 지난 12일 공식 출범했다. 한국의 예술가들을 적극적으로 발굴·후원하고, 동시대 예술을 역사의 한 축으로 만들기 위한 예술 커뮤니티를 만들겠다는 목표다. 서울 용산구 한남동에서 열린 출범식에서 300여 명의 한국 예술계·기업인들과 만난 그는 대화 중 여러 차례 ‘상상력’과 ‘예술적 본능’에 대해 이야기했다. “우리 모두 (예술가였던) 어린 시절로 돌아가 마음껏 상상하고, 그때처럼 꿈을 꿀 수 있다면 누구나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것이었다.

청 회장은 한국의 예술 애호가과의 첫 만남을 문화예술 플랫폼 아르떼에서 글로 먼저 시작한다. ‘에이드리언 청의 아트 살롱’ 칼럼을 통해 파워 컬렉터이자 예술 애호가로서, 한국에 전하고 싶은 메시지를 갖고 매달 찾아온다. 그와 오랜 인연을 이어온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예술계 인맥들이 총출동할 예정이다. 김보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