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이 지난 14일 발사한 탄도미사일은 고체연료 기반의 극초음속 중거리탄도미사일(IRBM)로 확인됐다. 낮은 고도에서 빠른 속도로 변칙 기동을 해 요격이 사실상 불가능한 ‘게임체인저’로 평가되는 무기다.15일 조선중앙통신은 “14일 오후 극초음속 기동형 조종 전투부를 장착한 고체연료 IRBM 시험 발사를 성공적으로 진행했다”고 보도했다. 전날 합동참모본부는 “우리 군은 평양 일대에서 동해상으로 발사된 중거리급 탄도미사일로 추정되는 한 발을 포착했다”며 “북한의 미사일은 약 1000㎞를 비행한 후 동해상에 탄착했다”고 발표했다.이번에 북한이 쐈다고 주장한 극초음속 미사일은 통상 음속의 다섯 배(마하 5) 이상으로 비행한다. 일반적인 탄도미사일과 달리 궤적을 예측할 수 없고 변칙적으로 기동하는 게 특징이다. 일정 고도에서 강하와 도약을 반복하는 ‘지그재그’ 비행이 가능하다.최고 고도 역시 수백㎞에 이르는 일반 탄도미사일과 달리 극초음속 미사일은 30~70㎞에 불과하다. 요격 시스템이 탐지할 수 있는 거리가 짧고 그만큼 대응 시간도 촉박해진다. 일본 방위성은 “이번에 발사된 북한 미사일의 최고 고도가 약 50㎞ 이상이었다”고 밝혔다. 또 고체연료를 사용해 운반과 보관이 쉽고, 기습적인 발사가 가능한 것으로 평가된다.극초음속 미사일의 이 같은 특징으로 한·미 미사일 요격망이 무력화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우리 군이 보유한 패트리엇 미사일(PAC-3) 속도는 마하 3.5~5 수준이다. 양무진 북한대학원대 교수는 “북한의 이번 발사는 ‘킬 체인’ 무력화에 중점을 둔 것으로 보인다”며 “당 전원회의에서 결정한 국방력 강화, 전쟁 준비 완성 박차, 핵무력 강화가 빈말이 아님을 과시하고 정치적으로 한반도 긴장 조성을 통한 군사적 주도권을 확보하기 위한 의도로 풀이된다”고 설명했다.이날 국방부는 “이번 북한의 미사일 발사는 한반도 평화와 안정을 심각하게 위협하는 명백한 도발 행위로 강력히 규탄한다”고 밝혔다.김종우 기자 jongwoo@hankyung.com
"한반도 상황이 1950년 6월 초반 이후 그 어느 때보다 더 위험하다."미국 미들베리국제연구소의 로버트 칼린 연구원과 지그프리드 해커 교수가 지난 11일(현지시간) 북한 전문매체 38노스에 기고한 글이 파장을 일으키고 있다. 이들은 "김정은이 1950년에 할아버지가 그랬듯이 전쟁하겠다는 전략적 결정을 했다고 생각한다"고 분석했다.이 기고문이 주목받는 이유는 두 사람이 그동안 북한 문제에 있어 정통한 전문가였다는 점과 관련이 있다. 칼린 연구원은 1989년부터 2002년까지 미국 중앙정보국(CIA) 동북아 담당 국장과 대북 협상 수석 고문 등을 지낸 인물이다. 1996년 2월 이후 30회가량 북한을 방문했다.지난 2000년 10월 매들린 올브라이트 당시 국무장관 평양 방문 때 장관을 수행하기도 했다.해커 교수는 미국내 최고 핵무기 연구소인 로스앨러모스 연구소장을 지냈으며 2000년대 수차례 북한을 방문한 바 있다. 북한은 해커 교수 등을 불러들여 영변 핵시설 내에 있는 최첨단 우라늄 농축 설비를 공개하기도 했다.두 전문가의 '위험 진단'은 2019년 2월 하노이 북미정상회담에서 협상 결렬에 크게 실망한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결국 미국과의 관계 정상화를 완전히 포기했으며, 핵무기를 보유한 상황에서 전쟁을 결심하게 했다는 분석에서 비롯된 것으로 알려졌다.그러면서 "김정은이 언제 어떻게 방아쇠를 당길지 모르지만 지금의 위험은 한미일이 늘 경고하는 '도발' 수준을 넘어섰다"면서 "지난해 초부터 북한 관영매체에 등장하는 '전쟁 준비' 메시지가 북한이 통상적으로 하는 '허세'가 아니다"고 강조했다.최근 북한의 동향도 이들의 분석에 무게를 실어주고 있다.북한은 지난 14일 오후 평양 일대에서 동해상으로 중거리급 탄도미사일을 발사했다. 한국 군당국은 이 탄도미사일이 극초음속미사일 또는 고체연료 추진체계를 적용한 신형 중거리탄도미사일(IRBM), 준중거리탄도미사일(MRBM)일 가능성을 주시하고 있다.또 북한은 13일에는 노동신문을 통해 "지난 시기 북남관계 개선과 평화통일을 위한 연대기구로 내왔던 단체들을 모두 정리하기로 했다"고 밝혔다.남북관계를 '민족' 개념으로 보지 않고 있다는 점을 재확인하며 대남도발을 한층 더 강화하겠다는 전략에서 비롯된 것으로 풀이됐다.북한은 현재 50∼60개에 달하는 핵무기를 보유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한국과 일본, 괌은 물론 미국 본토까지 사정권에 둔 다양한 탄도미사일 도발도 잊을 만하면 하고 있다. 이에 따라 미국과의 외교, 또는 관계개선이라는 목표가 상실됐을 경우 북한이 결국 확보한 무기들을 활용한 군사적 행동 가능성이 갈수록 커질 것으로 전문가들은 전망하고 있다. 칼린 연구원과 해커 교수는 기고문에서 "지나치게 극적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이라는 단서를 달았다.북한의 끝내 군사적 수단에 의존하기로 결심을 굳힌 단계는 아니라는 의미로 해석된다.북한 외교관 출신 국민의힘 태영호 의원은 15일 한 라디오에 출연해 "미국 전문가들이 남북 관계 대결 상황을 6·25전쟁 전과 같다고 평가했는데 그때와 지금은 구조적으로 완전히 다르다"며 두 전문가의 분석이 "과도한 평가"라고 지적했다.핵보유 전략국가라는 국가적 목표를 설정한 김정은이 대화와 협상보다는 '강 대 강' 대치 국면을 이어갈 것이라는 분석에 무게감이 실리고 있다.조아라 한경닷컴 기자 rrang123@hankyung.com
#1 우리는 이미 침투해서 첫날 묵은 적이 있는 서대전역 근처의 여관에 다시 가서 잠을 자기로 했다. 그리고 그날 밤 12시에 라디오를 통해 평양방송을 청취해서 숫자로 된 지시전문을 받아 밤사이에 그것을 모두 해독했다.당시 북한으로부터 받은 방송지시는 ‘성공적인 침투를 축하한다는 것, 대상공작을 안전하게 잘하라는 것, 9월 15일 전으로 경기도 남양주군 능내리에 있는 무인포스트 장소에 침투 시 안내조와 약속한 제주도 남제주군 성산읍 온평리 해안 접선장소 약도를 그려서 매몰하라는 것’ 등이었다.#2 내가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당일 아침 6시 45분~7시 사이에 평양방송을 통해 접선신호 노래가 나오는지를 확인하는 것이었다. 나는 라디오를 평양방송 주파수(중파 657㎑)에 맞추고 약속된 신호노래가 나오는지를 확인했는데 나오지 않았다. 계획된 시간에 접선을 할 수 있다는 뜻이었다. 북한 공작부서와 공작조가 미리 약속한 제목의 노래가 나오면 당일 접선을 할 수 없다는 뜻이고 노래가 나오지 않으면 예정대로 접선을 한다는 뜻이다.1995년 부여 무장공비 침투사건으로 체포된 무장간첩 김동식의 회고록 '아무도 나를 신고하지 않았다'에 나오는 문장들이다. 간첩이 라디오를 통해 어떻게 지령을 받는지가 잘 나타난다. 특히 '평양방송'을 통해서 숫자로 된 지시 전문을 받아 해독했다는 대목은 '난수방송'이 실존했음을 알 수 있다.북한이 지난 12일 오후부터 대남방송을 하던 국영 라디오 평양방송을 중단했다. 평양방송은 한국 주민에 대한 선전·선동을 목표로 1960년대부터 운영됐다. “지금부터 27호 탐사대원들을 위한 원격교육대학 물리학 복습과제를 알려드리겠다. 178페이지 99번, 78페이지 40번…” 등 난수방송을 통해 남파간첩에게 지령을 내린 것으로도 유명하다. 의문의 숫자... 난수방송 뭐길래난수방송은 1960년대부터 이어져온 것으로 추정된다. 난수방송은 무작위로 만들어진 수열인 난수를 암호로 이용해 특정 대상에게 내용을 전달하기 위한 방송을 말한다. 듣는 사람과 암호를 대응하기 위한 미리 약속된 방법이 있어야 하고, 난수를 모아놓은 난수표가 필요한 경우도 있어 이를 모르는 사람은 해독하기가 거의 불가능하다. 인터넷의 발달로 지금은 난수방송이 거의 사라졌지만, 1980년대까지만 해도 이불 속에서 은밀하게 라디오를 듣는 사람은 '간첩'이라는 인식이 있을 정도였다.평양방송이 진행했던 난수방송은 처음엔 '평양의 큰아버지가 서울의 조카에게 보낸다'는 식의 일종의 오프닝 멘트를 붙인 뒤 숫자를 읽어주는 방식으로 송출됐다. '조카'가 지령을 받는 간첩을 뜻하는 암호인 셈이다. 이후 "2805호 전문을 보내드리겠습니다. 조수 12조, 조수 12조, 본문 부르겠습니다. 654, 48, 299..."는 식으로 숫자가 나온다. 이 숫자들과 그에 맞는 단어들을 조합하면 특정 암호가 나온다.이 방송은 2000년 제1차 남북정상회담 이후 사라졌지만, 2016년 7월 돌연 재개됐다. 다만 이 때는 방식이 바뀌었다. "지금부터 27호 탐사대원들을 위한 원격교육대학 물리학 복습과제를 알려드리겠다"며 특정 페이지의 문제 번호를 읽어주는 식이다. 난수방송이 시작되기 직전 '기쁨의 노래 안고 함께 가리라' '고향의 봄' 같은 오프닝곡을 띄우고, 복습과제의 과목도 물리학부터 과학, 수학, 외국어, 화학 등으로 다양하게 나눴다. 당시 디지털 시대에 갑작스럽게 난수방송이 재개된 데에 대해 전문가들은 '대남 심리전'의 일환으로 분석하기도 했다.또 꽤 최근까지도 국내 일부 지역에서 들을 수 있었던 북한발로 추정되는 난수방송 '앵무새'도 있다. 해외 난수방송 분석 커뮤니티 NSRIC에 따르면 2015년께까지 수신됐던 이 방송은 남파공작원 대상이 아닌 북한 인민군의 훈련용 방송일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숫자를 읽은 뒤 '앵무새'라는 단어를 통해 방송을 끝맺고, 중간 중간 '락두산' 같은 단어를 섞는다. 락두산은 함경북도 청진에 있는 지명이다. 북한 외에도 난수방송 한다... 2020년 해프닝도난수방송은 평소엔 대중들이 쉽게 접할 수 있는 개념이 아니지만, 이슈가 있을 때마다 몇 년에 한 차례씩 화제가 되기도 한다. 2016년 16년 만에 재개된 난수방송 때도 그렇고, 최근 평양방송이 중단되면서 과거의 난수방송이 언급되자 또 그랬다. 2020년엔 북한이 유튜브를 통해 난수방송을 재개했다는 소문이 돌았다. 그해 8월 평양방송 유튜브 채널에선 숫자 조합으로 된 제목의 1분 5초짜리 음성 콘텐츠가 올라왔다. 영상 속에서 여성은 “친구들, 719 탐사대원들을 위한 원격교육대학 정보기술 기초복습 과제를 알려드리겠습니다"며 "564페이지 23번, 479페이지 19번, 694페이지 20번" 등 숫자를 불렀다. 이어 "지금까지 719 탐사대원들을 위한 기초복습 과제를 알려드렸습니다. 여기는 평양입니다"라고 마무리했다. 영상은 한때 조회 수 1만 회를 넘겼다가 몇 시간 뒤 갑자기 삭제됐다.방송의 형태가 난수방송과 흡사해 북한이 유튜브를 통해 남파 간첩에게 지령을 내린 게 아니냐는 의혹이 나왔다. 통일부도 "북한의 SNS 관련 정보가 없어 파악하기 힘들다"고 했다. 다만 이 영상은 국내 한 보수단체가 과거 패러디용으로 만든 것과 똑같은 것으로 밝혀지면서 단순 해프닝으로 끝났다. 애초 평양방송이란 이름을 붙인 유튜브 채널이 공식 채널이 아닐 가능성이 컸고, 난수방송이 유튜브로 나온다는 것도 상상하기 어려웠다. 난수방송은 북한의 전유물은 아니다, 한국도 난수방송을 자주 한 것으로 전해진다. 물론 북파 공작원을 대상으로 한 게 아닌, 단순 대북 심리전 차원이라는 분석도 있다. 그밖에 키프로스, 동독, 쿠바, 베트남, 폴란 등에서 과거 난수방송이 존재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렇다면 일반인이 난수방송을 청취하면 불법일까? 그렇진 않다. 어차피 사전에 약속된 지령이 없는 이상 해석이 불가능한 데다가, 전파라는 공공재를 이용한 난수방송은 모두에게 공개돼 있기 때문에 듣는 것만으로는 처벌받지 않는다. 김종우 기자 jongwo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