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칼럼] 독재자들의 공갈
“우리 군은 마침내 전 세계에 우뚝 섰다. 지난해 시작한 공세를 즐겁게 마무리할 준비가 됐다. 영국은 이제 붕괴할 것이다. 영웅들에게 감사한다.”

아돌프 히틀러의 1941년 신년 연설은 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당시 독일 국민을 열광시켰다. 하지만 이 연설을 한 것은 독일이 영국 침공 계획인 ‘바다사자 작전’을 포기한 직후다. 프랑스를 함락하고 나서 야심 차게 영국을 공격했다가 저항에 밀려 물러서기로 한 것이다. 서유럽을 모두 집어삼키겠다는 히틀러의 야욕은 사실상 무산됐다. 그런데도 승리 소식을 의심한 독일 국민은 없었다. 히틀러는 4년 후 독일이 패망하기 직전까지도 “승리가 눈앞에 있다”는 허언을 멈추지 않았다.

전쟁이나 갈등 상황에서 독재자들의 메시지는 몇 가지 특징을 지닌다. 구심점이 흔들리거나 여론이 악화할수록 메시지는 단호해진다. 승리와 영광이 눈앞에 있다는 기대, 영웅에 대한 헌사도 반복된다. 국민이 이런 ‘공갈’을 거부감 없이 수용하는 것은 외부 정보를 차단하고 언론을 통제한 상황에서 전달되기 때문이다. 이 발언을 검증하거나 견제할 정치 시스템도 부재한다.

올해 연초부터 북·중·러의 지도자들이 일제히 강경 메시지를 쏟아내고 있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은 “핵 무력을 포함해 모든 물리적 수단을 동원해 남조선을 평정하기 위한 대사변 준비에 박차를 가하겠다”고 했다. 지난해 양안(중국과 대만) 관계에 온건한 목소리를 낸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은 대만 총통 선거가 다가오자 “조국 통일은 역사적 필연”이라며 발언 수위를 높였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도 우크라이나 전쟁이 3년 차에 접어들자 고민이 커졌다. “휴전 협상을 시도 중”이라는 외신 보도를 의식한 듯 신년사 첫마디부터 “절대 후퇴는 없다”고 했다.

주변국과 정치권의 파장, 국민 여론 등을 감안해야 하는 민주주의 국가의 지도자였으면 이렇게 거침없이 말하기 어렵다. 한반도를 둘러싼 독재자들이 주변국과의 갈등을 노골화하고 있는데도 그들 내부에 이렇다 할 견제 장치가 전무한 현실이 새삼스럽다.

고경봉 논설위원 kgb@hankyung.com